
2월 10일, 1945년
김구,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성명 발표
1945년 광복 후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에서 귀국한 김구는 47년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 독립투쟁 위원회를 조직했다.
민족주의 입장에서 남측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하는 이승만과 대립하는 한편 북측의 공산주의에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 김일성의 단독정부 수립에도 역시 반대한 김구는 48년 2월 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이란 제목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그러나 그는 끝내 통일정부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듬해인 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
김구,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성명 발표
1945년 광복 후 임시정부가 있던 상하이에서 귀국한 김구는 47년 미국과 소련의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 독립투쟁 위원회를 조직했다.
민족주의 입장에서 남측만의 단독선거를 주장하는 이승만과 대립하는 한편 북측의 공산주의에도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 김일성의 단독정부 수립에도 역시 반대한 김구는 48년 2월 10일 ‘삼천만 동포에게 읍소함’이란 제목의 단독정부 수립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그러나 그는 끝내 통일정부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듬해인 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