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카카오스토리
  • 검색

[비즈人워치]이제는 칼을 내려 놓자

  • 2018.04.27(금) 10:01

전규범 현대백화점 생식품팀 과장 인터뷰
백화점 첫 밀키트…새 푸드 라이프 스타일 선봬
'삼십고초려' 끝에 그랑씨엘 대표와 콜라보 성공

처음 칼을 잡은 것은 10년 전이었다. 아내와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이 시작이었다. 맞벌이 부부였던 우리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 내몰려 있었다. 매일 전쟁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일상에 지쳐있었다. 특히 아내는 회사 일과 육아를 병행하다 보니 더 힘겨워했다. 육아와 가사에 나 몰라라 하는 가장은 아니었지만 은연중 육아는 아내에게 전담시켰다. 솔직히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날도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술자리를 끝낸 후 새벽에 귀가했다. 조금이라도 눈을 붙이고 출근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샤워하려고 욕실의 불을 켜는 순간 거실 소파에 누군가가 우두커니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 아내였다. 아내는 울고 있었다. 누군가에게 뒤통수를 맞은 것 마냥 멍했다. 무언가 잘못됐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때부터다. 주말만이라도 아내에게 휴식을 주고 싶어 칼을 잡았다. 벌써 10년 전 이야기다,

지난 10년간 주말마다 부엌에 있었다. 레시피는 인터넷, 요리책 등을 참고했다. 기본적으로 먹는 것을 좋아해 이것저것 만들어봤다. 이력이 붙으니 이제는 냉장고에 있는 재료만으로도 대충 만들어 낸다. 한식과 일식, 중식, 양식 기본적인 음식은 대부분 만들어봤다. 지금은 흔하지만 예전에는 '밥하는 아빠'가 흔치 않았다. 반응도 좋다. 아이들은 지금도 주말에 아빠가 무엇을 만들어줄까 기대한다.

10년간 칼잡이였던 내게 현대백화점이 밀키트(meal kit)를 내놨다는 소식은 궁금증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맛은 어떨지, 재료는 무엇을 썼을지, 레시피는 어떨지 그리고 무엇보다 도대체 왜 현대백화점이 밀키트 시장에 뛰어들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지난 25일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본사를 찾았다. 이곳에서 이번 밀키트를 기획했단 전규범 현대백화점 생식품팀 과장을 만났다.

▲ 전규범 현대백화점 생식품팀 과장(사진=이명근 기자/qwe123@)

인터뷰는 처음이라 긴장된다는 말과 달리 전규범 과장은 능숙했다. 특기인 '닥치고 질문'에 들어갔지만 그는 술술 이야기를 풀어냈다. 시종일관 자신감 있었고 자료 준비도 착실히 해왔다. 이런 경우 인터뷰가 무척 편하다. 전 과장은 2010년 현대백화점에 입사해 지금껏 식품 쪽 일만 담당해왔다. 특히 현대백화점의 식재료 품질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는 "다른 백화점들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현대백화점은 식재료 담당 바이어들이 매일 아침마다 직접 장을 봐서 매대에 진열한다"며 "소비자들로부터 현대백화점의 식재료 품질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현대백화점이 선보인 밀키트인 '셰프박스(Chef Box)'도 현대백화점의 식재료를 이용해 만든다.

밀키트는 HMR(가정간편식)의 한 종류다. HMR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밀키트는 그 중 RTC(Ready To Cook)에 속한다. 즉 밀키트 안에 들어있는 식재료들을 이용해 주어진 레시피대로 요리하면 된다. 요리는 간단하다. 주로 끓이고 볶고 하는 정도다. 요리 시간도 약 10분~30분 내외다. 예쁜 그릇에 담아내면 유명 레스토랑의 쉐프가 조리한 음식의 모양과 맛을 그대로 집에서도 즐길 수 있다.

현대백화점은 작년 4월부터 밀키트 출시를 준비했다. 전 과장은 "네덜란드의 '빌더 앤 클레르크(Bilder & De Clercq)'라는 슈퍼마켓을 참고했다"며 "유기농 식재료를 판매하는 매장인데 여기에서는 식재료들과 함께 이를 이용해 만들 수 있는 요리의 레시피와 주방용품까지 함께 카테고리화 해 판매한다. 단순히 제품이 아니라 푸드 라이프 스타일을 선보이고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고 밝혔다.

밀키트 출시를 준비하면서 현대백화점도 고민이 많았다. 현대백화점은 소비자들에게 좀 더 제대로 된 밀키트를 선보이기 위해 협력할 곳을 찾았다. 그때 눈에 들어온 곳이 신사동에서 10년 넘게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큰 인기를 끌어온 '그랑씨엘'이었다. 실력파 셰프들의 집합소인 신사동에서 10년 이상 레스토랑을 운영했다는 건 그만큼 소비자들의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게다가 그랑씨엘의 이송희 대표는 이미 자체적으로 밀키트를 제작해 온라인 판매를 하고 있었다. 현대백화점은 그랑씨엘과의 협업을 위해 이송희 대표를 찾았다. 하지만 첫 반응은 부정적이었다고 한다. 전 과장은 "이송희 대표를 30번 정도 찾아갔다"면서 "하지만 첫 반응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래서 현대백화점의 고급 식재료를 공급하고 제품을 개발하자고 끊임없이 설득했다"고 말했다.

현대백화점의 설득이 주효했던 것일까. 결국 현대백화점과 이송희 대표는 첫 작품을 내놓는다. 그는 "사실 나의 주된 담당은 현대백화점의 프리미엄 전통 식재료 브랜드인 '명인명품'이다. 각종 장(醬)류 등 국내산 유기농 식재료들을 브랜드화한 것"이라며 "그랑씨엘과 첫 협업 밀키트로 명란 오일파스타와 차돌박이 겉절이를 냈는데 여기에 명인명촌의 '장석준 명란'과 '매실바다 매실청'을 넣었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매출은 신통치 않았다. 온라인 판매이다 보니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대신 소비자들의 문의가 많았다. 현대백화점은 이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매출은 많지 않았지만 소비자들의 관심은 확인할 수 있었다"며 "그래서 오프라인 매장을 열어 소비자들에게 본격적으로 밀키트 제품을 선보이기로 했다. 현재 론칭 9일째인데 매출 목표 대비 이미 160% 이상 달성했다. 반응이 좋다"고 밝혔다.

현재 현대백화점의 '셰프박스' 매장은 무역센터점에만 있다. 이를 점진적으로 확대해 현대백화점 전 점에서 만나볼 수 있도록 한다는 게 목표다. 전 과장은 "'셰프박스'에는 현대백화점의 고급 식재료와 이송희 대표의 요리솜씨가 담겨있다. 이 대표도 셰프박스의 맛이 본인의 레스토랑에서 선보이는 메뉴 맛의 90%에 가깝다고 했다. 그런 만큼 이제 집에서도 신사동 유명 레스토랑의 요리를 맛볼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대백화점이 셰프박스를 통해 추구하는 지향점은 단순히 밀키트 제품을 선보이는 것이 아니다. 앞서 설명한 네덜란드의 빌더 앤 클레르크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푸드 라이프 스타일을 선보이려는 시도다. 실제로 셰프박스 매장에서는 다양한 주방 기구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 주방 기구들은 이송희 대표가 직접 써보고 추천하는 아이템들이다. 그만큼 현대백화점은 이번 셰프박스에 많은 공을 들였다.

사실 가장 궁금했던 것은 현대백화점이 왜 갑자기 밀키트라는 새로운 영역에 도전했느냐다. 그동안 현대백화점은 '퍼스트 무버(first mover)'보다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현대백화점의 셰프박스는 백화점 업계 최초의 밀키트다.

전 과장은 "최근 현대백화점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며 "이번 셰프박스를 기획하면서도 매출이 적게 나더라도 푸드 라이프 스타일을 제안해보자는 취지에 회사가 적극 공감해줬다. 새로운 것을 개척하고 새로운 문화를 보여주는 것에 적극적"이라고 설명했다. 현대백화점은 앞으로 셰프박스 메뉴도 더욱 다양화할 계획이다. 우선 오는 5월에는 파스타를 선보일 생각이다.

셰프박스에 대한 설명을 듣고 보니 호기심이 생겼다. 더불어 꾀도 났다. 어쩌면 생각보다 빠른 시간 내에 10년간 주말마다 잡아 왔던 칼을 이제는 놓을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좋은 식재료에 유명 레스토랑의 레시피가 제공된다면 굳이 직접 칼을 잡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요리하는 즐거움은 줄겠지만 그보다도 이제는 좀 쉬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건 너무 간사한 생각일까? 고민스럽다.
SNS 로그인
naver
facebook
goog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