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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人워치]'평창 롱패딩' 그 뒷얘기들

  • 2018.06.28(목) 16:43

최은경 롯데百 치프 바이어·한윤희 바이어 인터뷰
가성비, 시의적절한 유행포인트 집어내면서 적중
초기 2주간 무반응 속앓이…SNS 소문나며 '대박'

덕 다운이 들어간 패딩 점퍼는 신세계였다. 게다가 방수가 되는 천으로 된 덕 다운 패딩 점퍼라면 친구들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지금이야 구스 다운이 대세지만 그 당시에는 덕 다운이 대세였다. 덕 다운 이전 패딩 점퍼의 충전재는 모두 솜이었다. 솜으로 된 패딩 점퍼만 입어도 추운 겨울을 거뜬히 날 수 있었다. 그런데 덕 다운이라니, 최신 방수천이라니, 등굣길 칼바람이 하나도 무섭지 않았다.

30여 년 전 중학교 입학 선물로 부모님께서 큰돈을 들여 어렵사리 최신식 덕 다운 패딩 점퍼를 사주셨다. 당시 TV에서 선전하던 최신식 방수천이 적용된 덕 다운 패딩이었다. 심지어 왼쪽 소매에 영어로 최신 방수천의 마크까지 붙어있던 최신상이었다. "졸업할 때까지 최소 3년은 입어라"라는 부모님의 말씀은 안중에도 없었다. 빨리 입고 학교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고등학교 때도 입었다. 본전 뽑았다.

특별할 것 없는 디자인과 색상이었다. 하지만 역시 아이들의 눈은 정확했다. 단번에 알아봤다. "야, 이게 그거야?"라며 주위에 몰려들었다. 친구들은 신기해했다. 어깨가 으쓱 올라갔다. 하지만 그때는 몰랐다. 곧 대참사가 벌어질 줄은. 한 친구가 "진짜 방수가 되는지 알아보자"고 했다. 두려웠다. 앞뒤 안 재는 놈들이라 어떤 솔루션이 나올지 궁금했다. 그때 다른 한 친구가 이렇게 외쳤다. "침 뱉어보자".

나의 첫 덕 다운 패딩은 그렇게 첫날부터 봉변을 당했다. 집에 돌아와 홀로 방안에 앉아 덕 다운 패딩 점퍼를 닦으며 복수를 다짐했다. 마침 덕 다운 패딩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녀석들도 하나둘씩 비슷한 제품을 입고 왔다. 똑같은 방법으로 그들의 패딩 점퍼도 실험해보려 했지만 녀석들은 완강했다. "네 것으로 증명했잖아". 그때 그 시절 덕 다운 패딩 점퍼는 센세이셔널했다.

 

▲ 최은경 롯데백화점 상품1본부 라이선싱팀 치프 바이어(Chief Buyer). (사진=이명근 기자/qwe123@).

 

올해 초 평창 동계올림픽보다 더 인기를 끈 것이 있다. 바로 '롱패딩'이다. 정확하게는 '평창 롱패딩'이다. 평창 롱패딩의 인기를 보면서 '누가 기획했을까' 궁금했다. 당시 여러 경로로 수소문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래서 '언젠가는 꼭 만나봐야지'하고 벼르기만 했다. 그리고는 또 잊어버렸다. 그러다 최근에 문득 그 생각이 떠올랐다. 다시 연락을 취했고 운 좋게도 이번에는 연락이 닿았다.

시기적으로 묵은 아이템이다. 하지만 꼭 알아보고 싶었다. 평창 동계올림픽 최대 히트작인 '평창 롱패딩'이 만들어진 그 뒷이야기들을. 지난 26일 서울 중구 소공동 에비뉴엘 빌딩에서 최은경 롯데백화점 상품1본부 라이선싱팀 치프 바이어(Chief Buyer)와 한윤희 바이어를 찾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장마가 시작되는 날이어서 엄청난 비가 쏟아졌다. 빗줄기를 뚫고 찾아간 그곳에서 그들을 만났다.

늘 그렇지만 참 어색했다. 의례적인 인사를 나누고 마주 앉았다. 인터뷰이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나부터 여유롭게 상대를 대해야 한다. 머릿속에는 갖가지 단어들이 떠올랐다. 무엇부터 물어야 하나 고민하면서도 표정으로는 웃음을 잃지 않으려고 애썼다. 날씨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비가 참 많이 오네요. 오느라 엄청 힘들었어요". 상대가 웃는다. 다행이다. 징조가 좋다.

본격적으로 인터뷰를 시작했다. 소개를 부탁했다. 최 치프 바이어는 15년 차 바이어다. 현재는 롯데백화점 상품본부 라이선싱팀 소속이다. 롯데백화점 라이선싱팀은 TF로 꾸려진 조직이다. 상품본부에서 경험이 많은 바이어들만 추려 모아 평창 동계올림픽을 위한 상품을 기획하는 팀이다. 라이선싱팀은 이달 말까지만 활동한다. 이후 팀은 그대로 유지하되 롯데백화점만의 색다른 상품을 기획하는 팀으로 전환할 계획이라고 했다.

 

 

인터뷰의 주제인 '평창 롱패딩'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자 두 사람의 표정에 살짝 변화가 일었다. 순간 많은 감정이 교차하고 있음을 느꼈다. 최 치프 바이어는 "아이디어 회의를 정말 많이 했다. 88년 서울올림픽 이후 처음으로 국내에서 열리는 올림픽이어서 올림픽 상품을 만들어 본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알아볼 수 있는 채널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정말 고민이 많았다"고 했다.

그는 "절망적이었던 것은 당시 평창 동계올림픽이 이슈가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올림픽을 알려야 하는 것이어서 현실은 희망적이지 않았지만 그런 만큼 유행할만한, 파격적인 아이템이 필요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롱패딩이었다"라고 회고했다. 그렇다면 그 많은 아이템 중에 하필이면 왜 롱패딩이었을까.

최 치프 바이어는 "2016년말에 '도깨비'라는 드라마가 크게 히트를 쳤다. 그때 도깨비에 출연한 연예인들이 입고 있는 롱패딩에 대한 문의가 소비자들 사이에서 많았다. 특히 유행에 민감한 젊은 층을 중심으로 롱패딩을 찾는 수요가 많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것이 롱패딩을 유심히 지켜보게 된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당시 국내 의류시장에서 롱패딩은 매년 겨울 크게 유행하는 아이템이 아니었다. 그래서 업체들도 롱패딩은 많이 출시하지 않았던 시기다.

그는 "수요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후 롯데백화점 본점에 있는 스포츠 매장 매니저들과 상담했다. 소비자들과 최접점에 있는 만큼 현실에서 체감하는 올해 가장 유행할 것 같은 아이템이 무엇인지를 물었더니 다들 롱패딩을 꼽았다. 그래서 롱패딩을 해보자고 마음먹었다"고 소개했다. 연예인들의 전유물이다시피 했던 롱패딩을 찾는 수요가 수면 아래에 있다는 것을 간파한 그는 롱패딩을 낙점했다. 

 

▲ 한윤희 롯데백화점 상품1본부 라이선싱팀 바이어.(사진=이명근 기자/qwe123@).

 

그와 한 바이어는 그때부터 롱패딩을 제작해 줄 업체 섭외에 나섰다. 다양한 브랜드의 업체들을 찾아다녔다. 중국 공장을 직접 알아보기도 했다. 하지만 롯데백화점이 원하는 가격과 품질을 맞출 수 있는 곳은 거의 없었다. 그때 손을 잡아준 곳이 이번 평창 롱패딩을 제작한 신성통상이다. 최 치프 바이어는 "신성통상은 마침 SPA 브랜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가 원하는 수량과 가격을 상당부분 맞출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신성통상과 작업이 처음부터 순조롭진 않았다. 그는 "우리 주문량이 3만 장이었는데 처음에는 신성통상 측에서도 난색을 표명했다"며 "국내 의류업계에서 롱패딩이라는 단일 아이템만으로 3만 장이라는 수량을 제작하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런데도 최 치프 바이어와 한 바이어는 이를 밀어붙였고 결국 제작에 돌입했다. 최 치프 바이어는 "지금 생각하면 모험이었다"고 회고했다.

평창 롱패딩이 공전의 히트를 칠 수 있었던 것은 '가성비' 덕분이었다. 구스 다운을 충전재로 사용하면서도 14만9000원이라는 가격이 크게 어필했다. 당시 시중에 나와 있던 다른 롱패딩 제품 가격은 대부분 20만원 후반대에서 30만원대였다. 그 절반 가격에 거의 같은 품질의 롱패딩이 나왔으니 소비자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도 비밀은 숨어있었다.

최 치프 바이어는 "구스 다운은 아시다시피 가격이 높다. 또 시간이 갈수록 가격이 더욱 올라간다. 그래서 신성통상을 파트너로 정한 후 곧바로 구스 다운을 선구매하는 작업을 진행했다"고 털어놨다. 미리 대량으로 구매해 가격 변동의 영향을 최소화한 셈이다. 그리고 이런 전략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하지만 마진은 높지 않았다. 그는 "마진율은 다른 제품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평창 롱패딩이 처음부터 인기를 끈 것은 아니었다. 초기에는 반응이 너무 없어 두 바이어의 속을 태웠다. 최 치프 바이어는 "출시 초기에 매장에 직접 가서 옷을 세팅하고 있는데 중고생을 둔 어머니들이 관심을 보였다. 이것저것 물어보시더니 좋다고 내일 사러 오겠다고 해서 물량을 일부러 빼놨는데 다음 날 오시지 않았다. 정말 속상했다"고 말했다.

평창 롱패딩의 인기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약 2주가 지난 후부터였다. 평창 롱패딩이 가성비에 세련된 디자인까지 갖췄다는 평가가 SNS를 통해 알려지면서 판매가 급격하게 늘었다. 급기야 포털사이트 검색어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그때부터 롯데백화점 각 지점에는 평창 롱패딩을 사기 위한 소비자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한 바이어는 "인원이 모자라 포장부터 각 점포 물량 분배까지 최 치프 바이어와 둘이서 대부분 처리했다. 물량이 모자랄 때는 들어오는 대로 사무실에서 입고하고, 온라인에 입고 수량을 적어 두면 1분 만에 완판되곤 했다. 한번은 1분에 300장이 한꺼번에 나간 적도 있었다. 주변에서 구매를 부탁하는 전화가 너무 많이 와 이를 거절하느라 무척 애를 먹었다. 2분에 한 번씩 전화가 와 일을 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전했다.

최 치프 바어어는 "한번은 부산에 물량이 풀리는 날이어서 현장 분위기를 보기 위해 평창 롱패딩을 입고 간 적이 있었다. 매장 근처에 서서 보고 있는데 시민들이 주변에 오시더니 '이것 어디서 샀느냐, 사이즈가 몇이냐, 좀 입어봐도 되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많았다. 내가 직원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는데도 그만큼 관심이 많았다. 정말 행복했다"고 말했다.

 

 

평창 롱패딩의 성공 요소 중 하나는 단순한 디자인이다. 다른 올림픽 기념상품과 달리 평창 롱패딩은 올림픽 기념품 특유의 패치나 디자인과는 거리가 멀다. 이유가 궁금했다. 한 바이어는 "무척 고민이 많았다. 눈꽃모양 패치도 만들어 붙여보고 여러 색깔과 모양으로도 모두 만들어봤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알록달록하게 만들면 입기에 부담스럽다. 올림픽 관련 제품은 젊게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고민한 것이 지금의 디자인"이라고 했다.

실제로 평창 롱패딩엔 올림픽 제품임을 알 수 있는 아이템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2018'이라는 숫자도 일부러 평창 롱패딩 안쪽에 배치했다. 올림픽이 끝나도 계속 입을 수 있는 라이프 웨어(Life Wear)로 만들려고 했던 그들의 의지가 담겨있다. 최 치프 바이어는 "기본 스타일에 충실하면서도 올림픽이 지나서도 입을 수 있게 하자는 것이 평창 롱패딩 제작의 기본 취지였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큰 인기를 끈 평창 롱패딩을 왜 더 생산하지 않았을까. 최 치프 바이어는 "사실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신성통상 쪽에서도 빨리 공장을 돌리면 올림픽 기간에도 상품이 나올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올림픽은 2월이었는데 그때는 겨울제품의 시즌 오프 기간이다. 아울러 어렵사리 평창 롱패딩을 산 소비자들이 가지고 있는 희소성의 가치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평창 롱패딩을 성공시킨 롯데백화점 라이선싱팀은 최근 포상을 받았다. 황각규 롯데지주 부회장은 표창을, 강희태 롯데쇼핑 대표는 포상휴가를 줬다. 인터뷰가 끝나고 엘리베이터 앞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폭풍 같은 일들이 지나간 만큼 좀 허탈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최 치프 바이어는 "지금 롯데백화점에 걸맞은 새로운 상품을 개발 중이다. 우리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제품들이다. 기대해 달라"며 웃었다.

나의 첫 덕 다운 패딩 점퍼에 테러를 가했던 친구들은 이제 모두 구스 다운 패딩 점퍼를 입고 다닌다. 그런데도 여전히 송년회 때마다 그때 덕 다운 패딩 점퍼 이야기를 한다. 아재들이다. 그 매개는 언제나 나의 첫 덕 다운 패딩 점퍼다.

 

평창 롱패딩의 열풍은 끝났다. 하지만 최 치프 바이어와 한 바이어는 매년 겨울마다 평창 롱패딩을 떠올리지 않을까. 그들에게 그 때 그 열정과 반응은 평생 잊히지 않을 듯싶다. 여전히 내가 나의 첫 덕 다운 패딩에 얽힌 추억들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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