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듣기 좋은 이야기를 드리지는 못할 것 같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작심 발언'이 화제입니다. 통상적으로 그룹의 총수가 작심 발언을 하고 나섰을 때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시그널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표현은 다들 다르지만 "이런 식으로는 안된다. 똑바로 해라"라는 질책과 경고의 메시지를 줄 때 사용합니다. 총수가 이렇게 나오면 계열사 대표 및 임원들은 바짝 긴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15일 열린 '2020 상반기 롯데 VCM'자리가 바로 이런 자리였습니다. 그동안 VCM은 신 회장이 각 계열사의 대표이사와 임원들로부터 한 해의 계획을 보고받고 그룹의 향후 방향을 공유하는 자리입니다. 행사가 끝나면 신 회장과 신임 대표들과의 식사 자리도 마련됩니다. 한마디로 "한 해 동안 잘 해보자"라며 격려와 덕담이 오가는 공식 행사인 셈입니다.
하지만 올해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전언입니다. 일단 휴대폰을 '압수'당했습니다. 철통보안 속에 외부와 연락이 완전히 차단된 채 오롯이 신 회장의 쓴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참석자들에게는 고역이었을 겁니다. 그만큼 이번 롯데 VCM의 분위기는 무겁고 비장했습니다.
이번 VCM은 롯데미래전략연구소의 발표로 시작했습니다. 내용은 한마디로 '암담'했다는 것이 참석자들의 전언입니다. 현재 국내외 경제 상황과 불확실한 미래 등이 주된 내용이었습니다. 이어진 롯데지주 경영전략실 발표는 더욱 뼈아팠다고 합니다. 지난 수년간 롯데 주력 계열사들의 실적 부진, 재무 상황 등에 대한 리뷰는 물론 대응 방안 등이 이야기됐습니다. 참석자들의 마음에 큰 부담이 지워졌을 겁니다.
롯데는 이번 VCM에서 다시 한번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T)을 강조했습니다. DT는 신 회장과 롯데그룹이 수년간 지속적으로 이야기해온 부분입니다. 하지만 신 회장은 롯데의 DT 속도가 더디다고 판단했습니다. 급변하는 경영 환경을 따라가지 못하는 계열사들에 대한 일종의 질책이었습니다. 이날 VCM에서는 처음으로 DT 현황을 공유하는 토크 콘서트가 열렸습니다. 토크 콘서트 형식을 빌린 질책이었던 셈입니다.
압권은 회의 맨 마지막에 등장한 신 회장이었습니다. 그동안 신 회장은 VCM에서 말을 아끼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주로 '듣는 경영자'였던 그는 이번만큼은 작심 발언을 이어갔습니다. 사실 신 회장의 변화는 작년 말부터 감지됐습니다. 작년 10월 경영 간담회 자리에서 신 회장은 예전과 달리 자신의 의견을 적극 개진했습니다. 황각규 롯데지주 부회장이 '비상 경영'을 선포한 그 자리에서 말입니다.
이번 VCM에서 신 회장의 발언은 그 수위가 매우 높았습니다. 그는 최근 롯데의 경영 성과에 대한 우려를 가감 없이 표현했습니다. 그룹 성장의 두 축이던 유통과 화학 부문의 부진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여기에 기타 부문도 부진을 이어가는 현 상황에 대해 신 회장이 강하게 질책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신 회장은 "과거의 성공 방식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면서 "기존 성공 스토리나 관성은 모두 버리고 스스로 시장의 새 판을 짜는 '게임 체인저'가 돼야 한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이어 "현재 경제 상황은 우리가 경험해왔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면서 "저성장이 뉴노멀이 된 상황에서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기업의 생존이 어려울 수 있다"라고 지적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신 회장의 이날 발언에는 '날선 비판'들이 많이 등장했습니다. 롯데지주가 배포한 보도자료에는 정제된 단어들로 가득하지만 실제 참석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신 회장의 발언이 맞나?' 싶을 정도로 격앙된 표현들이 많았습니다. 예를 들어 "상명하복 기업문화를 반성해야 한다", "적당주의를 버려라", "위닝 스피릿이 없다", "수익 안 나는 사업은 과감히 접는다" 등이 대표적입니다.
늘 조용히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해왔던 그의 기존 스타일과는 완전히 상반된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이처럼 변하게 했을까요? 우선 롯데 주력 사업의 실적 부진이 가장 큰 원인일 겁니다. 유통사업의 핵심인 롯데쇼핑의 경우 최근 수년간 수익성이 악화하고 있습니다. 소비 트렌드가 온라인으로 옮겨가고 있지만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뒤늦게 온라인 강화를 외치고는 있지만 성과는 처참합니다.
또 다른 축인 화학 부문도 글로벌 경기 부진과 제품 수급 악화 등으로 수익성이 나빠지고 있습니다. 핵심 사업군 중 하나인 식품부문도 부진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주류부문도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오죽하면 신 회장이 식품부문을 지적하면서 "기억나는 신제품이 없다"라고 할 정도였을까요. 그룹의 사활을 걸고 상장을 준비 중인 호텔부문에 향해선 재무구조 개선 주문했습니다.
주력 사업들의 실적 부진이 모두 각 계열사의 대표와 경영진의 탓만은 아닙니다. 신 회장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런 현상과 상황에 젖어 무기력한 대응으로 일관하고 각 부문의 태도였습니다. 그가 '적당주의', '과거의 성공 방식', '기존의 틀을 깨는 게임 체인저' 등의 단어를 사용한 것은 이런 그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는 분석입니다.
VCM에 참석했던 한 고위 관계자는 "20여 분간 이어진 신 회장의 발언에 장내가 숙연해졌다"면서 "몇 년 동안 신 회장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다. 다들 좌불안석이었다. 가끔씩 정제되지 않은 단어들이 불쑥 튀어나올 때에는 깜짝 놀라기도 했다. 현 상황에 대해 최고 경영진들이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라고 토로했습니다.
이와 함께 이번 VCM에서 신 회장이 강력한 발언을 이어간 또 하나의 이유는 '원톱'으로서 자신의 지위와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옵니다. 그동안 그의 발목을 잡아왔던 국정농단 사건에서 자유로워진 만큼 이제는 그룹 전반을 장악해 자신의 의지대로 끌고 나가겠다는 확실한 시그널을 줬다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그동안 신 회장은 국정 농단 사건뿐만 아니라 2015년부터 벌어진 형제의 난 등으로 그룹을 실질적으로 완벽히 장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어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불확실성이 상당 부분 제거된 상황입니다. 한국과 일본 롯데의 명실상부한 수장으로서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내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최근 젊은 피들을 대거 전면에 포진시킨 인사를 직접 챙기고 단행한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또 다른 롯데 고위 관계자는 "그룹 내부에서도 신 회장이 국정 농단 사건에서 자유로워진 이후 그룹 전반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다"라며 "이번 VCM에서 작심 발언을 이어간 것도 그런 의지의 한 표현이 아니겠느냐. 올해는 반드시 예전과는 다른 결과물을 내놓으라는 주문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업계에서는 신 회장이 현재 롯데그룹이 처한 현실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번 VCM을 통해 속내를 드러낸 것도 일종의 '경고'라는 분석이 많습니다. 그동안 변화에 둔감했던 롯데에 일침을 가하고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내가 직접 칼을 뽑겠다는 시그널을 줬다는 겁니다. 신 회장에게 쓴소리를 잔뜩 들은 롯데는 과연 올해부터 변화된 모습을 보여줄까요? 향후 롯데의 행보가 무척 궁금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