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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인 신격호]③꿈은 이뤘지만

  • 2020.01.21(화) 09:00

롯데월드도 '좁다'…롯데월드타워로 숙원 이뤄
30년만에 결실…두 아들 경영권 분쟁에 빛 바래

국내 대기업 마지막 창업 1세대인 신격호 롯데그룹 명예회장이 별세했다. 문학청년이던 그는 혈혈단신 일본으로 건너가 갖은 고생 끝에 재계 5위의 롯데그룹을 일궜다. 껌으로 시작해 식품, 유통, 화학, 건설, 제조, 금융에 이르기까지 한국과 일본 양국 경제에 큰 이정표를 세웠다. 하지만 그는 늘 경계인이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큰 업적을 이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어느 곳에도 깊게 뿌리박지 못했다. 비즈니스워치는 약 한 세기에 가까웠던 경계인 신격호의 삶을 시기별로 재조명하고 그가 남긴 업적과 숙제 등을 정리해본다. [편집자]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습니까? 21세기 첨단산업 중 하나가 관광입니다. 그러나 한국에는 구경거리가 별로 없어요. 세계에 자랑할 만한 시설을 조국에 남기려는 뜻밖에 없습니다. 놀이시설도 호텔도 제대로 한 번 세울 겁니다" 임종원 <롯데와 신격호, 도전하는 열정에는 국경이 없다> 27쪽 발췌

신격호 명예회장의 경영인생에서 최후의 도전은 제2롯데월드다. 제2롯데월드는 신 명예회장의 평생 숙원이었다. 그가 포기를 모르는 경영인이라는 것은 바로 제2롯데월드의 건축 과정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이미 롯데월드라는 초대형 건물을 완성했지만 신 명예회장에게 여전히 좁았다. 어렵사리 세운 롯데월드는 그의 눈에 '구경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신 명예회장은 서울올림픽이 한창이던 1988년 송파구 신천동 29번지 일대 8만7182㎡(2만6373평)를 사들인다.

제2롯데월드의 추진은 신 명예회장 경영 인생의 마지막 도전이었다. 그만큼 쉽지 않았다. 제2롯데월드 부지는 경기도 성남시에 위치한 서울공항과 직선거리로 5㎞에 불과했다.

결국 1990년 서울시는 항공법과 공군기지법 규정에 따라 제2롯데월드 건설 계획을 불허했다. 김영삼과 노무현 등 두 전 대통령은 이전 대통령들과 달리 원칙을 내세워 신 명예회장과 어떤 협상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신 명예회장의 의지는 확고했다. 정권이 두 번이나 바뀌었지만 꿈을 버리지 않았다. 잠실 부지의 땅값이 계속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지만 다른 용도로 사용하지 않았다.

이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자 기회가 왔다. 현대건설 출신의 대통령과 신 명예회장은 궁합이 맞았다. 이 전 대통령은 대선 경선과 당선인 시절을 롯데호텔 스위트룸에서 머물렀다.

이 전 대통령 설득에 성공한 신 명예회장은 결국 2009년 제2롯데월드 건축승인을 획득했다. 10번에 걸친 건축승인신청의 결과였다. 2010년 송파구청의 최종승인도 떨어졌다. 해당 부지를 사들인 지 22년 만이다.

제2롯데월드 건설 단계에서는 유독 사건사고도 많았다. 각종 안전사고는 물론 석촌호수 물빠짐 사태 등으로 위기를 겪었다. 하지만 신 명예회장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제2롯데월드 건설은 그의 오랜 숙원이던 만큼 의지가 확고했다.

결국 제2롯데월드는 우여곡절 끝에 2016년 완공됐다. 123층, 555m 높이로 연면적은 축구장 115개 넓이인 80만5872㎡(4만3776평)에 달했다. 날씨만 좋다면 서울 대부분의 지역에서 롯데월드타워를 바라볼 수 있다. 신 명예회장의 숙원이 이뤄진 셈이다.

회광반조(回光返照)라는 말이 있다. 촛불이 사그라지기 전에 한 차례 크게 불꽃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제2롯데월드는 신 명예회장의 마지막 촛불이었다.

롯데월드타워 공사가 한창이던 2015년 롯데그룹의 경영권 분쟁이 수면 위로 드러났다. 장남 신동주와 차남 신동빈이 롯데그룹의 패권을 놓고 다퉜다.

신 명예회장은 원래는 장남 신동주에게 일본 롯데를, 차남 신동빈에게 한국 롯데를 맡기려 했다. 장녀 신영자에겐 롯데면세점을 물려줄 예정이었다. 이에 따라 신동주를 롯데홀딩스 부회장으로, 신동빈을 한국롯데 회장 자리에 앉혔다. 신영자는 롯데쇼핑 사장으로 임명했다.

하지만 롯데를 분할하는데 드는 비용이 문제였다. 이 탓에 적극적으로 경영 승계를 준비하지 못했다. 그 결과 두 아들이 모두 회장을 맡는 불안한 구조가 이어져 왔다. 두 아들의 불안한 동거는 곧 부메랑이 돼 날아왔다.

그러던 중 장남 신동주가 2015년 1월 그룹의 모든 보직에서 해임됐다. 신 명예회장의 뜻에 따른 것이라는 것 외에는 다른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더불어 그 해 7월에는 차남 신동빈이 일본 롯데홀딩스의 대표이사로 선임되면서 경영권 다툼이 끝나는듯했다.

▲ 신격호 명예회장의 젊은 시절

하지만 반전이 있었다. 그해 7월 신동주 부회장이 고령의 아버지를 데려가 일본 롯데홀딩스의 이사를 모두 해임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장남이 아버지를 등에 업고 차남 체제를 무너뜨리려 쿠데타를 벌였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때부터 롯데그룹의 경영권 분쟁이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신동빈 회장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형인 신동주 부회장이 진행한 해임은 불법이라고 맞섰다. 아울러 아버지를 롯데 대표이사에서 해임하고 명예회장으로 추대했다.

이후 두 아들은 수많은 소송과 지분싸움, 이사회·주주총회 개최 등으로 치열한 경영권 분쟁을 벌였다. 신 명예회장은 신동주 부회장의 편을 들었지만 최종 승자는 차남인 신동빈 회장이었다. 이 과정에서 베일에 가려있던 롯데그룹의 지배구조는 물론 오너 일가의 민낯이 드러나기도 했다.

롯데그룹의 원톱으로 올라선 신동빈 회장은 '뉴 롯데'를 새로운 기치로 내걸었다. 아버지의 대를 이어 롯데그룹의 바통을 이어받았다는 사실 대내외적으로 확인시켰다.

아들들의 권력 다툼 속에서 신 명예회장은 2017년 5월 롯데월드타워 118층 전망대에 올랐다. 롯데그룹 경영권 분쟁으로 편치만은 않은 자리였다. 하지만 잠실에 대한민국의 랜드마크를 세우겠다는 꿈을 꾼지 30년 만에 그 결실을 직접 확인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신 명예회장은 2010년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이후에도 정정한 모습을 보여왔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병색이 짙어졌다. 이후 신 명예회장은 롯데홀딩스 주주총회를 통해 이사진에서 제외됐다. 자신의 꿈이 현실이 된 것을 확인한 지 한달 여만의 일이다.

롯데 창업 70년, 한국 진출 50년 만에 신격호의 시대는 이렇게 저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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