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통가에서 이례적인 장면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연일 치솟던 식품업체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가격 인하' 소식을 내놓고 있는 건데요. 발단은 밀가루와 설탕이었습니다.
정부가 밀가루와 설탕 가격 담합을 지적하며 물가 안정 의지를 강조했고 이재명 대통령의 "가격 인하 혜택이 국민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발언이 기폭제가 됐습니다. 이후 빵을 시작으로 라면, 과자, 아이스크림까지 잇따라 가격 인하에 나서면서 '가격 인하 릴레이'가 현실이됐습니다.
하지만 소비자들의 반응은 냉담합니다. "내렸다고는 하는데 장바구니에 담을 게 없다"는 하소연이 이어지고 있는데요. 지표상으로는 물가가 안정되는 듯 보이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머니 사정은 그대로
국가데이터처 소비자물가조사에 따르면 2020년을 기준으로 2021년 102.08이었던 가공식품 물가지수는 2023년 117.55까지 급등했습니다. 이 시기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여파로 곡물 가격이 폭등했던 때입니다. 이후 2024년 119.68, 2025년 124.04로 상승세는 둔화됐는데요. 그럼에도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누적된 상승분' 입니다. 2021년과 비교하면 지난해 가공식품 물가는 이미 21.5% 오른 상태입니다. 소비자물가지수는 가격 수준이 아닌 변동률을 나타내는 지표인 만큼 상승 속도가 둔화됐다고 해서 가격 자체가 낮아지는 건 아닙니다.
게다가 20% 넘게 오른 상황에서 1~5% 수준의 가격 인하는 체감 상 크게 와닿지 않습니다. 가격을 내려도 장바구니 사정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체감 물가의 향방을 결정짓는 실질적인 변수는 '외식 물가'입니다. 실제로 가구 식품비 지출 구조를 보면 지난해 기준 가구당 외식비는 44만원으로 전체 식품비의 50.1%를 차지합니다. 가공식품(29.1%)의 약 1.7배 수준이죠. 외식이 사실상 소비자의 체감 물가를 좌우하고 있는 셈입니다.
예를 들어 라면이나 과자 가격이 수백원 내려가더라도 한 달 전체 소비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합니다. 반면 점심값이 1000원 오르면 직장인의 경우 한 달 식비 부담이 수만원씩 늘어나는데요. 결국 물가를 잡으려면 가공식품 가격 인하보다 외식비 억제가 훨씬 더 시급하고 중요하다는 방증입니다.
물가 흐름의 주도권도 바뀌는 추세입니다. 2023년까지는 가공식품 지수(117.55)는 외식 지수(117.38)보다 높았습니다. 가공식품 원재료 가격 상승이 물가를 주도했던 시기였죠.
그러나 2024년 외식 물가지수는 121.01을 기록하며 가공식품(119.68)을 추월했습니다. 2025년에는 외식 물가지수가 124.72까지 오르며 격차를 더 벌렸습니다. 이제는 외식비 상승이 전체 물가를 견인하는 구조로 전환됐다는 분석이 나옵니다.
가격 결정 구조의 차이도 체감 물가를 옥죄는 요인입니다. 가공식품은 제조사의 할인 정책이나 유통사 간의 점유율 경쟁을 통해 유연한 가격 조정이 가능합니다. 반면 외식비는 인건비와 임대료, 배달 수수료 등 고정비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습니다. 이에 따라 한 번 오른 가격은 좀처럼 내려오지 않습니다.
결국 소비자들은 지출 비중이 큰 외식비는 치솟고 비중이 작은 가공식품만 소폭 내리는 '물가의 엇박자' 상황을 마주하게 된 겁니다.
'만 원'으로 한 끼 때우기도 빠듯
외식비의 현실은 더욱 냉혹합니다. 한국소비자원 가격정보포털 '참가격'에 따르면 서울 지역의 주요 외식 품목 가격은 최근 10년간 40~80% 상승했습니다. 가장 가파르게 오른 품목은 김밥인데요. 2017년 한 줄 평균 2144원이었던 김밥은 현재 3800원으로 77.3% 상승했습니다.
식재료비뿐 아니라 조리 과정에서 인건비 비중이 높은 김밥의 특성상 누적된 최저임금 인상분이 가격에 고스란히 반영된 결과죠. 짜장면 역시 50% 넘게 올랐는데요. 서민 음식이라는 말이 무색해진 상황입니다.
직장인들의 단골 점심 메뉴인 칼국수와 김치찌개도 예외는 아닙니다. 10년 전 6000원대였던 칼국수는 현재 9943원으로 사실상 '1만원 시대'에 들어섰습니다. 김치찌개 역시 50% 가까이 상승했습니다.
서민들의 시름을 달래주던 삼겹살도 '귀한 몸'이 됐습니다. 2016년 200g 기준 1만5000원 수준이었던 삼겹살 가격은 현재 2만원을 넘어섰는데요. 4인 가족이 외식으로 삼겹살을 먹을 경우 기본 식사비만 8만원을 훌쩍 넘기게된 셈이죠.
결국 소비자들 사이에서는 가공식품 가격 인하만으로는 체감 물가를 낮추기 어렵다는 의견이 나옵니다. 정부가 식품 기업의 팔을 비틀어 얻어낸 '가공식품 가격 인하'는 물가 잡기의 일부에 불과한데요.
가계 지출의 핵심인 외식비 부담이 가중되면서 소비자가 느끼는 실질 물가는 여전히 높은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소비자들은 라면 한 봉지 가격을 50원 내리는 것보다, 매일 먹는 점심값이 500원 오르는 것에 훨씬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이제는 '가공식품'에 대한 가격 관리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합니다. 체감물가를 좌우하는 외식 물가를 함께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인건비 부담 완화와 임대료 안정, 그리고 배달 플랫폼 수수료 체계 개편 등 외식업의 고정비 구조를 건드리는 근본적인 처방이 시급합니다.
결국 핵심은 가격을 직접 통제하기보다 비용 구조를 낮추는 데 있습니다. 외식업 전반의 고정비 부담이 완화되지 않는 한 가격은 다시 상승 압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같은 구조적 개선 없이는 물가 지표와 소비자가 체감하는 생활비 사이의 괴리를 좁히기 어렵다는 지적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