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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돈 풀기, 한국 외환위기와 미국발 금융위기 차이

  • 2020.04.09(목) 17:12

코로나19사태, 각국 중앙은행 유동성 무제한 공급
미국발 금융위기때 학습효과...경제체질 점검·개선 기회 삼아야

아버지가 병원에서 시한부 통보를 받았다. 전업주부로 살아오던 어머니는 초등학생인 아들을 부양하기 위해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한다. 병원비에 생활비, 대출금 상환까지 당장 돈 들어갈 곳이 한두군데가 아니다. 어머니 월급은 가계를 지탱하기엔 턱없이 모자란 수준이다.

특단의 대책이 없다면 이 가족은 파산으로 내몰릴 상황이다. 정부가 이 가족을 도와줘야 한다고 치자. 아버지 없이도 가계가 원활히 돌아가게 돕는 게 목적이다. 선택지는 두 가지다. 돈을 먼저 무제한 공급해 형편을 추스를 수 있게 하는 것과 형편을 먼저 추스리면 돈을 지급하는 것이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인 문제처럼 보일 수 있지만 코로나19 사태를 마주하고 있는 각국의 입장은 전자로 통일된 것처럼 보인다. 일단 모두의 숨통이 트이도록 돕겠다는 취지다. 코로나19 사태가 재해에 가까운 만큼 당연한 방향으로 보이지만 여기에는 일종의 학습효과가 녹아들었다는 분석이다.

시곗바늘을 12년 전으로 되돌려 보자. 끝없이 계속 오를 줄만 알았던 미국 주택가격이 떨어지기 시작하자 촘촘하게 엮여 있던 세계 금융시스템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던 때다. 자금압박에 시달리는 기관이 속출하면서 베어스턴스와 메릴린치가 팔려나갔고 리먼브라더스는 파산에 내몰렸다. 2008년 금융위기다.

당시 미국 중앙은행 격인 연준은 최종 대부자 역할에 충실했다. 시장이 자금을 필요로 할 때 먼저 돈을 무제한 빌려주고 불안을 해소함으로써 경기를 원상복구시키겠다는 것으로, 낙오자를 최대한 줄여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방점이 찍혔다. 연준은 기준금리를 인하하고 국채를 대거 매입하는 등의 양적완화 조치를 통해 위기돌파에 나섰다.

연준이 당시 위기에 적절히 대처했는지에 대한 평가는 논외로 하더라도 이후 미국 경기가 완만한 회복세를 기록했다는 평가에는 이견이 없다. 지난해 실업률은 반세기만에 최저점을 찍었고 다우존스, S&P500, 나스닥 등 뉴욕 증시는 역대 최고점을 갱신했다. 연준이 추진한 방향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국면이 바뀐 것은 지난달. 코로나19가 세계로 확산하면서부터다. 9일 오전 9시 현재 전 세계 코로나19 확진자는 150만 명에 육박한다. 사망자는 8만7000명에 달한다. 확산세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으면서 경제활동이 크게 둔화하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달 세계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기존 2.9%에서 0.5%포인트 내려 2.4%로 하향조정했다.

코로나19 충격은 과거 사스, 메르스 사태에 비해 상당히 크다. 일각에서는 금융위기 이상의 쇼크가 있을 거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제껏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사태임에도 불구하고 각국 중앙은행은 일제히 비슷한 처방을 내리고 있다. 가계와 기업에 자금을 풀어 경기침체를 막자는 것으로 2008년 미국 연준이 취한 조치와 사실상 같은 방향이다.

우리나라 정부는 100조원 규모의 비상금융조치를 통해 기업지원에 나섰고 가계에는 긴급재난지원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한국은행은 채권을 매입해 돈풀기에 나선다. 미국과 일본, 독일 등도 천문학적 자금을 투입한다. 각국 지자체는 중앙정부가 제공하는 대출 상품을 이용하라는 안내문을 기업과 가계에 전하고 있다.

이번 코로나19 사태는 2008년 금융위기와 성격이 다르다. 금융위기가 촘촘하게 짜여있던 시스템이 부동산 가격 하락을 시작으로 안에서부터 분열된 사건이라면 코로나19 사태는 외부 바이러스가 시스템 안으로 난입해 기존의 경제질서를 이리저리 휘저으면서 혼란이 가중되는 모양새다.

이처럼 두 사태의 배경은 다르지만 시장과 경제에 심각한 불확실성을 가져오고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게 한 점은 같다. 금융시장이 경색되는 것은 물론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경제 전체가 마비될 거란 우려가 나온다. 한치 앞을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 계속되자 실제 경제활동이 꽁꽁 얼어붙고 기업 실적에도 비상등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코로나19 사태에 대처하는 각국 중앙은행 정책이 적절한지에 대해 전문가들의 평가는 신중하다. 하지만 급하게 전개되는 상황에서 더 좋은 방법을 고안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비교적 최근의 성공 사례를 답습할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과거 금융위기를 극복한 연준 정책을 각국 중앙은행이 정책 참고 자료로 검토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란 얘기다.

돈줄이 마른 곳에 정부가 돈을 빌려주고 일단 경기침체를 막는 게 당연한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과거 사례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유동성 문제를 겪고 있던 우리나라에 IMF가 돈을 빌려주고 내린 처방은 차입경영과 과잉투자로 떨어진 효율성을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통해 극대화하라는 것이었다.

금융위기 땐 기업과 가계를 무제한 지원해 경기회복을 이루는 것이 최우선 과제였다면 외환위기 땐 긴축 조건을 먼저 제시하고 이를 달성하면 경기회복이 이뤄질 것이라고 기대한 점에서 달랐다. IMF의 주문은 1930년 세계 대공황 당시 미국 정부가 제창했던 청산이론의 연장선이다. 불필요한 거품을 모조리 걷어내 경제를 효율화시키자는 게 청산이론의 골자다.

한 대학교수는 "외환위기 당시 IMF 주문은 미국 정부의 의사를 상당부분 반영했다"고 평가하면서 "금융위기때에 연준이 외환위기 때와 정반대의 조치를 내놓은 것은 당시 정책이 실패했다고 평가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고도성장과 완전고용을 축으로 성장한 우리나라 경제 체질은 IMF를 계기로 180도 바뀌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각국 중앙은행 조치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예측하긴 어렵다. 코로나19 사태가 언제까지 계속될 수 있을지 알 수 없고 정책집행이 시급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인 돈 풀기'에 초점을 맞춘 지금의 중앙은행 조치가 가져올 부작용도 경계해야 한다. 무조건 자금지원이 아닌, 경제 각 부문의 체력과 체질을 점검하고 개선하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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