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주의 유산(遺産)은 위대했다. 조(兆) 단위 상속재산을 물려줬다고 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장수(長壽)기업을 꿈꾸며 치밀한 설계 아래 2대(代) 세습 기반을 닦아놓은 은덕(恩德)이 있었다. 선친의 갑작스런 별세에도 후계자는 30대 후반의 나이에 속전속결로 경영권을 접수했다.
글로벌 1위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NIKE)의 신발 제조업체로 잘 알려진 TKG(옛 태광실업)를 자산·매출 3조원의 중견그룹으로 키워 낸 ‘신발왕’ 고(故) 박연차 창업주 얘기다. 사주(社主) 일가가 상속세 6400억원을 물고도 2세 지배기반은 외려 더 단단해졌다. 묻어두기엔 아까운 얘기다.
창업 16년 만에 찾아온 호기 ‘나이키’
TKG는 현 TKG태광이 모체다. 나이키 신발 OEM(주문자상표부착생산)·ODM(제조업자개발생산’) ‘빅4’ 중 하나다. 총자산(TKG태광 연결)이 3조3500억원(작년 9월 말)이다. 1999년(1170억원)에 비해 30배에 가깝다. 자기자본은 348억원에서 1조9600억원으로 증가했다.
거의 매년 예외 없이 성장한 데서 비롯됐다. 매출은 3210억원에서 2022년에는 3조8300억원을 찍었다. 영업이익이 흑자를 거른 적은 2005년 딱 한 번뿐이다. 재작년에는 3380억원을 벌어들였다. 23년 전(325억원)의 10배가 넘는다.
계열사도 총 38개(국내 12․해외 26)나 된다. 신발사업의 중추 TKG태광을 정점으로 베트남․인도네시아․중국 5개 생산공장과 화학(TKG휴켐스·TKG애강·일렘테크놀러지·에어로젤코리아․KVF), 소재(TKG에코머티리얼), 전력(태광파워홀딩스), IT(태광데이터시스템), 투자(TKG벤처스), 레저(정산개발) 분야의 계열사들이 포진한다.
박 창업주의 유산이다. 경남 밀양 출신으로 동아대 경영학과 졸업 뒤 부산의 신발회사에 다니다 1971년 10월 정일산업을 창업했다. TKG의 뿌리다. 26살 때다. 초기에는 당시 신발 OEM 업체 국제․삼화․진양 등의 협력사에 불과했다. 1970년 후반 완성품 시장에 진출, 반전의 계기를 마련했다. 태광실업으로 법인 전환한 것도 1980년 12월이다.
호기(好機)가 찾아왔다. 창업 16년째 되던 해인 1987년 나이키의 파트너사로 지정됐다. 일찌감치 해외 생산기지 확보에 뛰어들어 1994년 7월 베트남 태광비나, 1995년 10월 중국 청도태광을 잇달아 설립했다. 52살 때인 1997년 5월 회장으로 취임했다.
파죽지세였다. 2000년대 들어 베트남목바이(2009년 9월), 태광인도네시아(2011년 10월), 베트남 태광껀터(2016년 3월)로 생산공장을 확장했다. 새 먹거리에도 공을 들였다. 2005년 10월 골프장 정산CC를 건설했다. 2006년 7월 국내 질산 생산 1위의 TKG휴켐스를 비롯해 2010년대 중반까지 인수합병(M&A)을 통해 쉼 없이 영토를 넓혔다.
2세 10대 후반부터 세습기반 닦은 박연차
갑작스러웠다. 박 창업주가 지병 악화로 별세한 때가 2020년 1월이다. 향년 75세. 기획조정실장(부사장)으로 활동하며 한창 경영단계를 밟고 있던 후계자의 나이 37살 때다. 박주환(41) 현 회장이다.
창업주가 딸 셋을 낳은 뒤 38살에 얻은 아들이다. 미국 위스콘신주립대 경제학과 출신으로 2010년 1월 TKG태광 입사 뒤 이듬해 9월 이사회로 직행하며 27살에 이미 가업 경영에 데뷔한 이다.
속전속결. 예기치 않게 이른 나이에 가업을 물려받았지만 머뭇거림은 없었다. 부친 작고 무렵 태광 대표에 오른 뒤 3개월 만에 회장 명함을 팠다. 이듬해 11월에는 창립 50돌을 계기로 사명을 ‘Tae Kwang Global’의 약칭 ‘TKG’로 갈아치웠다. 2대 경영자로서의 존재 증명이다. 작년 말에는 TKG태광의 ‘각자’ 꼬리표를 떼고 단독대표로 올라섰다.
박 회장의 지배기반 또한 확고부동이다. 2014년 4월 경영 입문 4년만인 31살 때 이미 비상장인 사실상 지주사 TKG태광 지분 39.46%를 소유. 부친(55.39%)에 버금갔다. 후계자의 나이 10대 후반에 3개의 2세 개인회사들을 만들어 해외 생산공장까지 동원해 손쉽게 키우고, 알짜 계열사 주식까지 얹어주며 창업주가 물샐틈없이 승계기반을 닦은 결과다.
오너 일가 5명이 6367억원의 상속세를 물고 나자 박 회장의 TKG태광 지배 지분은 70.87%로 뛰었다. 이번에는 모친과 세 누이가 힘을 실어줬다. 2대 사주를 위해 지배력을 몰아줬다.
쟁여놓았던 잉여금 아낌없이 쓴 박주환
창업주 작고 뒤 상속재산은 1조3213억원이다. 창업주가 1대주주로서 보유했던 TKG태광 주식 55.39%의 가치가 1조715억원으로 전체의 81%를 차지할 정도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박 회장이 물려받은 주식은 10.07%(1950억원)로 5분의 1이 채 안됐다. 민법상 법정비율(배우자 1.5대 자녀 1)대로 상속이 이뤄져서다. 45.31%는 모친과 세 누이 몫이었다. 신정화(73) 명예회장과 박선영(50) 전 TKG태광 대표, 박주영(48) 전 TKG애강·에어로젤코리아 총괄사장, 박소현(46) 전 태광파워홀딩스 전무다.
반면 현재 네 모녀가 들고 있는 지분은 3.45%가 전부다. 상속세를 무느라 주식 3781억원어치를 물납(物納)한 탓도 있지만 박 회장에게 2335억원어치를 넘긴 것도 한 이유다. 창업주를 도와 계열 경영에 참여했던 모친과 큰누나, 둘째 누나가 하나 둘 손을 뗀 것도 이 무렵이다.
박 회장으로선 상속세에다 추가 지분 인수까지 적잖은 자금이 필요했을 테지만 문제될 게 없었다. TKG태광이 버는 족족 쟁여놓았던 이익잉여금을 아낌없이 썼다. 이 또한 결과적으로 훗날 대물림에 대비한 창업주의 은덕일 수 있다.
박 회장의 개인지분은 45.74%지만 일가의 상속세 납부 전에는 단 한 주도 없던 TKG태광의 의결권 없는 자기주식이 35.47%로 불어나 계열 장악력은 경영권 승계 전보다 2배 가까이 강화됐다는 의미다.
TKG의 2대 세습 과정에 당신이 몰랐던 비밀들이 곳곳에 감춰져 있다. 박 회장이 ‘유아독존(唯我獨尊)’ 1인 체제를 갖추기까지의 변천사를 촘촘하게 다시 쓰는 이유다. ‘태진(泰進)’이 출발점이다. (▶ [거버넌스워치] TKG ②편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