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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기업]⑥국민도 기업도 살린 '활명수'

  • 2014.05.22(목) 13:30

비즈니스워치 창간 1주년 특별기획 <좋은 기업>
동화약품, 독립자금 전달 이어 희귀약품 제공

약이라고는 달여먹는 탕약밖에 몰랐던 조선 후기, 당시 궁중 선전관이었던 민병호 선생은 우리 민족 누구나 쉽게 상용할 수 있는 양약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민병호 선생은 궁중비방에 서양의학을 혼합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양약인 활명수를 만들어 냈다.

 

약을 구하기 힘들어 급체나 토사곽란으로 목숨을 잃던 시절에 활명수(살릴 活, 생명 命, 물水)는 이름 그대로 '생명을 살리는 물'이었다. 활명수의 개발은 대한민국 제약업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고, 제조회사를 설립하고 브랜드를 갖고 판매되었다는 사실은 한국 자본주의와 브랜드 역사에 한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동화약품과 활명수가 100년 넘게 굳건한 자리를 지킨 원동력은 끊임없는 품질 개선과 한우물 파기 전략이었다. 활명수가 잘 팔리자 경쟁사에서 내놓은 유사 상품이 범람했지만, 오히려 한 단계 업그레이드한 '까스활명수'를 개발하는 등 돌파구를 마련했다. 돈 되는 사업에 한눈 팔지 않고, 오로지 제약 한 분야에만 집중해 온 것도 동화약품만의 장수 비결로 꼽힌다.

 

▲ 1897년 설립된 동화약방 입구(서울 중구 순화동 5번지)

 

◇ 독립운동의 자금줄

 

동화약품에는 남다른 민족정신이 스며있다. 민강 초대 사장(민병호 선생의 장남)과 보당 윤창식 5대 사장, 윤광열 명예회장은 항일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민강 사장은 상해 임시정부와의 비밀연락기관인 서울 연통부를 회사 내에 설치하고 활명수 판매수익의 일부를 독립자금으로 전달하기도 했다.

 

윤창식 사장은 1915년 경제 자립을 통한 국권 회복을 위해 서울의 지식 청년 130명과 함께 '조선산직장려계'를 결성했다. 2년 후 조직이 경찰에 적발돼 옥고를 치른 후에도 빈민층을 도왔던 '보린회' 사업에 깊이 관여해 1920년부터 1959년까지 지원했다. 민족운동단체인 '신간회'에도 자금을 지원하는 등 국가의 독립과 어려운 이웃에 대한 헌신을 아끼지 않았다.

 

윤광열 명예회장도 선친의 대를 이어 광복군으로 활동했다. 그는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학교) 재학중이던 1944년 일제 학도병으로 강제 징집됐다가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탈영해 상해의 주호지대(駐戶支隊) 광복군에 편입, 5중대장을 맡았다. 이들의 민족정신은 곧 동화약품의 경영이념으로 승화됐다.

 

 

◇ 환자들의 희망 '희귀약품센터'

 

1973년에는 국내 최초로 희귀약품센터를 설립해 당시 공급이 원활치 않았던 의약품을 실비로 제공했다. 1970년대에는 국제적으로 현대적인 의약품 개발이 미진했고, 특히 제약산업 후진국이었던 우리나라는 병원에서 병을 진단하더라도 약이 없어서 치료가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의약품 수입상의 비협조와 불투명한 이윤 확보에도 불구하고 '약을 통한 사회봉사'를 실천한 것은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 1973년 설립한 희귀약품센터

 

국내 최초로 생산직 사원에 월급제를 도입한 것도 동화약품이다. 1978년 생산직에게 적용하던 시간제 급료제 대신 월급제로 급여 체제를 바꿨고, 이로 인해 사원들의 자부심과 생산성도 크게 높아졌다. 일각에서는 시기상조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동화는 모두 한 식구'라는 경영진의 신념이 강했다. 생산직 근로자에 대한 완전 월급제는 국내 유수의 기업들은 물론 노동계에도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 1930년대 활명수 생산모습

 

◇ 위기에서 빛난 '식구 사랑'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시절에는 부채비율이 300%를 넘는 등 경영이 악화되면서 구조조정을 단행해야만 했다. 대다수의 기업들은 인원을 감축해 위기를 모면했지만 동화약품은 기업 자체의 구조 개선을 통해 회생의 발판을 마련했다.

 

당시 살충제 시장 1위를 달리던 '홈키파' 브랜드를 미국의 다국적기업 크로락스에 매각해 경영의 효율성을 높였다. 1999년 76억원에 달했던 순손실이 이듬해 41억원의 흑자로 전환했고, 이후에도 각각 69억원(2001년)과 87억원(2002년)으로 순익을 키워나가며 위기를 극복했다.

 

윤광열 명예회장과 부인 김순녀 여사는 2008년 사재를 출연해 부채표 가송재단을 만들었다. 기업이윤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는 기업가정신을 실천하기 위해 내놓은 마지막 선물이었다. 가송재단은 가송의학상(대한의학회 공동제정), 활명수약학상(대한약학회 공동제정), 윤광열 치과의료봉사상(대한치과의사협회 공동제정)을 만들어 학술연구 지원사업을 진행하고, 장학생 선발과 전통문화 지원사업을 함께 펼치고 있다.

 

▲ 1919년 활명수 방어용 활명액 상표등록증

 

◇ 활명수가 살아남은 비결

 

일찌감치 연구개발에 힘을 모은 경영 전략은 100년 기업의 밑거름이 됐다. 윤광열 명예회장은 1970년대 안양공장과 중앙연구소를 신축해 이윤을 재투자했다. '민족기업'이라는 간판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현실을 직시했고, 신약개발과 효율적인 생산시스템 구축에 박차를 가했다. 투자비용 회수가 더딘 제약회사의 약점을 정면으로 돌파한 것이다.

 

동화약품의 역사와도 같은 활명수는 출시 초기 경쟁사들의 무수한 유사제품에도 흔들리지 않고 살아 남았다. 1967년 '까스활명수'를 개발해 콜라에서 느끼는 청량감을 선사했고, 1989년에는 '까스활명수-큐'를 통해 브랜드를 업그레이드했다. 1990년대 중반부터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라는 캠페인을 10년 넘게 벌인 결과 연간 1억병을 생산하고 시장점유율 70%를 차지하는 성과를 거뒀다.


활명수가 117년간 '국민 소화제'로 자리잡은 것은 뛰어난 약효를 바탕으로 소비자의 욕구(니즈)에 대한 연구를 게을리하지 않고 브랜드 차별화에 힘쓴 결과로 평가 받는다. 직원들에겐 '내 식구' 같은 안정감을 주고, 민족기업의 뿌리를 계승하는 사회 봉사 활동으로 내·외부 소통에 힘쓰는 경영 철학은 장수기업의 표본을 보여준다.

■ 동화약품은 

 

1897년 설립한 국내 최초의 제조회사이자 제약회사로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다. 주력 제품인 '활명수'와 상표 '부채표'도 가장 오래됐다. 활명수는 그동안 84억병이 팔렸는데 한 줄로 세우면 지구 25바퀴를 돌 수 있다.

 

활명수 외에도 후시딘과 판콜 등 400여종의 의약품과 30여종의 원료의약품을 생산해 세계 30여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지난해 영업이익 20억원, 당기순이익 10억원으로 다소 주춤한 모습이지만, 특유의 브랜드 파워와 신기술을 통해 재도약을 모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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