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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이야기]⑦한국 최악의 시나리오는…중국

  • 2017.09.11(월) 08:16

中, '반도체 먹는 하마' 평가 속 최대 위협 부상
기업인수·공장설립 등 2025년 자급률 70% 목표

1994년 11월 충남 아산에 위치한 도고 파라다이스호텔. 삼성전자의 메모리반도체 임원들이 모여 밤샘 토론을 시작했다. 논의 주제는 '삼성반도체가 망하는 두가지 시나리오'였다. 당시 삼성전자는 세계 최초로 양산한 16Mb D램을 앞세워 돈을 쓸어담던 시기였는데 이들은 3년 뒤 최악의 위기가 온다는 가정 하에 삼성의 생존법을 논의했다.


진대제 스카이레이크 인베스트먼트 회장(당시 삼성전자 메모리사업부장)은 자신이 쓴 책 '열정을 경영하라'에 그 때의 광경을 이렇게 전했다.

"황당하지만 상당히 가능성 있는 위기 시나리오를 들은 임원들의 얼굴은 대번에 굳어졌지만 대부분 고개를 끄덕였다."

삼성 메모리사업부가 가정한 위기는 ▲인텔이 메모리 사업을 다시 시작하고 ▲일본이 반도체 생산장비의 한국수출을 금지하는 것 두가지에 맞춰졌다. 이 가운데 첫번째 시나리오가 현실화됐다.

1997년 앤디 그로브 인텔 회장이 일선에서 물러나자 그의 후임자인 크레이그 베럿 회장이 메모리 반도체 설계회사인 '램버스'와 협력을 선언한 것이다. (램버스는 자신이 확보한 특허를 바탕으로 여러 반도체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걸어 '특허괴물'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다.)

삼성은 이를 1985년 메모리사업에서 철수한 인텔이 메모리시장에 다시 뛰어든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중앙처리장치(CPU)로 전세계 반도체시장 1위를 달리는 인텔이 한국이 힘겹게 장악한 메모리시장까지 넘보는 상황이 코 앞에 닥쳤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행히 삼성이 걱정한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지는 않았지만 위기를 예측하고 관리하는 시나리오 경영의 중요성을 느끼는 계기였다고 진 회장은 회고했다.

(그 뒤로도 인텔은 메모리시장 진출을 주기적으로 시도했다. 2015년에는 마이크론과 함께 '3D크로스포인트'라는 차세대 메모리 기술을 발표했고 약 6조2000억원을 들여 중국 다롄에 있는 인텔의 시스템반도체 공장을 메모리 공장으로 전환키로 했다. 이를 두고 반도체업계에선 '왕의 귀환'으로 표현한다.)

 

20여년이 흐른 지금 한국은 세계 최대의 메모리왕국을 이뤘다. 시장조사업체인 IHS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올해 2분기 전세계 D램 시장의 72%, 낸드플래시 시장의 49%를 장악했다. 한국의 수출 1위 품목 역시 반도체다. 올해 상반기 반도체 수출액은 429억달러로 전체 수출(2412억달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5%에 달했다.

이럴 때 '워스트(worst) 시나리오'를 작성해보면 어떨까. 전문가들이 가장 걱정하는 시나리오는 중국의 부상이다. LCD(액정표시장치) 시장에서 중국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은 중국 기업들이 급성장하며 한국 기업들의 생존을 위협했던 것과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현재 중국은 '반도체 먹는 하마'로 불러도 손색이 없다. 세계의 공장 역할을 하다보니 전세계에서 생산하는 반도체의 60%를 중국이 소화한다. 우리나라의 수출입통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매월 발표하는 정보통신기술(ICT) 수출입자료를 보면 지난 6월 반도체는 역대 최대인 80억달러대의 수출실적을 기록했는데 이 가운데 52억달러(65%)가 중국에 수출해 벌어들인 돈이다. 중국 정부가 한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에 따른 보복으로 아직까지 반도체를 건드리지 않은 게 우리로선 다행인 셈이다.

 

더욱 긴장하게 만드는 건 '반도체 굴기(倔起)'를 꿈꾸는 중국의 야심이다.

중국 정부는 현재 10%대 초반인 반도체 자급률을 오는 2025년까지 70%까지 끌어올리는 '중국제조 2025'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이를 위해 총 1조위안(170조원)을 반도체에 집중 투자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삼성전자의 지난 10년간 반도체 투자액이 총 110조원이었음을 감안하면 중국 정부의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중국의 국영기업이라 할 수 있는 칭화유니그룹이 2015~2016년 미국의 마이크론과 샌디스크 인수를 시도했던 것도 중국의 반도체 굴기와 무관치않다.

이미 중국은 시스템반도체와 연관된 팹리스(반도체 설계) 분야에서 한국을 뛰어넘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IC인사이츠는 올해 초 전세계 상위 50대 팹리스업체(반도체 설계회사)를 발표했는데 그 중 11개가 중국 기업이다. 한국에서 이름을 올린 기업은 실리콘웍스 한곳에 불과했다.

 

그간 중국은 스프레드트럼(2013년, 17억8000만달러), RDA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2014년, 9억1000만달러), NXP RF파워사업부(2015년, 18억달러), 옴니비전(2016년, 19억달러), NXP 표준제품사업부(2016년, 27억5000만달러) 등 해외 반도체기업을 인수할 때 조(兆) 단위의 돈을 쏟아부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같은 중국의 움직임을 가장 경계하는 곳이 한국이 아닌 미국이라는 점이다.

미국 정부는 마이크론과 샌디스크 인수를 좌절시킨데 이어 지난해는 중국 펀드가 독일의 반도체회사인 '아익스트론'을 삼키려 할 때 독일 정부에 계약 취소를 권고해 인수를 무산시킨 바 있다. 국제사회의 맹주로 부상하는 중국과 이를 견제하는 미국의 신경전이 손톱보다 작은 칩(반도체)에 녹아있는 셈이다.

이에 대응해 중국은 자국 내 독자적인 반도체 생산기지 구축으로 맞불을 놓고 있다. 칭화유니가 올해 초 우한·청두·난징에 총 700억달러를 들여 반도체 생산공장을 짓겠다고 발표한 것도 미국의 발목잡기에 더는 당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재임 중 인텔을 세계 1위의 반도체 회사로 올려놓은 그로브 회장은 '전략적 변곡점'이라는 개념을 중시했다.
기업은 근본적 변화가 필요한 시기, 곧 전략적 변곡점을 지나며 과거에 성공한 기업일수록 더 큰 위협을 받고 변화를 주저하게 된다는 게 그의 얘기다.

 

사상 최대의 호황 속에서도 중국의 도전을 눈 앞에 둔 한국 반도체업계가 곱씹어 볼 대목이 아닐까. 산이 높으면 골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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