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제조업이 흔들리고 있다. 세계적인 에어백 제조업체 타카타가 파산한 데 이어 고베제강과 도레이, 미쓰비시 등 내로라하는 기업들이 품질조작 파문에 휩싸였다. 이뿐만 아니라 닛산, 스바루와 같은 유명 완성차 제조업체도 스캔들에 휘말려 대규모 리콜을 실시했다. 한때 세계 시장을 호령했던 일본 제조업체들이 위기에 빠졌다는 표현도 과장이 아니다. 이들 기업이 닥친 문제를 알아보고 시사점을 찾아본다. [편집자]
"숨긴 게 아닙니다. 8월 말에 보고를 받고 나서야 10년 동안 품질조작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지난 10월13일 일본 도쿄 고베제강 기자회견장. 가와자키 히로야(68) 회장은 '고베제강의 품질조작 사실을 알고 있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생중계를 지켜보던 시청자들은 납득할 수 없다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가와자키 회장은 37년간 고베제강에서 근무한 이력을 들어 자신을 '현장통'이라고 소개한 전력이 있는데 문제가 터지자 모르쇠로 일관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다.
◇ 현장통도 몰랐다는 품질조작
일본 3대 철강회사이자 112년 역사를 자랑하는 고베제강의 신뢰가 땅으로 추락하는데는 두 달이 채 안걸렸다.
캔에 쓰이는 알루미늄과 자동차 부품에 사용하는 철가루 등 4개 제품군의 강도와 척도를 실제와 다르게 적어 고객사를 속였다는 사실이 드러난 건 지난 8월 말이다. 지난해 스테인레스 제품이 품질 기준에 못미친다는 지적을 받은 것을 계기로 내부 감사를 실시한 결과 곪을 대로 곪은 비리가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추가 조사에 들어간 고베제강은 10년 간 10명 정도의 현장 직원들이 조직적으로 품질 검사 기록을 조작했다고 시인했다. 그렇지만 일주일도 안돼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 최초 고베제강은 피해 기업수를 200여개라고 밝혔지만 조사가 진행되면서 철강사업을 비롯한 다른 분야에서도 조작이 있었고 피해기업수도 500여개에 달하는 것으로 파악됐기 때문이다.
당장 일본 여론이 들끓었다. '발표 내용 중 맞는 이야기가 없다', '내용 파악을 제대로 한 게 맞느냐'는 목소리가 나오는 등 고베제강에 대한 불신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결국 미국 정부는 고베제강에 신뢰가능한 자료 제출을 직접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유럽항공안전기관(EASA)도 관련 기업들에 품질조사에 나설 것을 지시한 상태다.
◇ 피해기업 200개→500개…땅에 떨어진 신뢰
고베제강을 둘러싼 의혹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건 무엇보다 경영진이 발표한 내용을 번복한 탓이 크다. 최초 상황파악만 제대로 했어도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파장이 확산되는 건 막을 수 있었는데 기회를 놓쳤다.
더구나 책임지는 사람이 눈에 띄지 않았다. 가와자키 회장은 자신의 용퇴를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일단 문제를 해결하고 진지하게 생각하겠다"며 당장의 사퇴는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을 내비쳤다.
고베제강은 10월 말 검사와 변호사로 이루어진 외부조사위원회를 꾸리고 올해 안에 원인 규명을 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한번 무너진 신뢰를 회복하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업계에 정통한 한 일본 변호사는 "고베제강의 신뢰는 제로(0)가 아니라 마이너스로 추락했다"고 전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과 도요게이자이 등 일본 주요 매체들도 "사건의 시작이 어디고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며 "이러한 무책임성이 일본의 제조업 신뢰를 끌어내렸다"고 지적했다.
◇ 불신의 중심엔 경영진이…"성과만 강요"
고베제강은 품질조작이 생긴 이유 중 하나로 경영활동이 수익 창출에 지나치게 치우쳐왔다는 점을 들고 있다. 실적을 내는 데 치중한 나머지 조직이 경직됐고 그 결과 현장 목소리가 경영진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우메하라 나오토 고베제강 부사장은 "실적을 강요하는 분위기가 생기자 사업부문별로 납기와 생산 목표달성 압박이 생겨 부정행위가 나타났다"며 "사업부문별로 폐쇄적 환경이 조성된 점도 상황을 악화시켰다"고 말했다.
고베제강에 이런 분위기가 조성된 건 10여년 전부터다. 중국 철강업체들이 생산량을 늘리며 물량공세를 퍼붓자 해외에서 입지가 좁아진 일본 업체들은 고로 운용을 중단하는 등 몸집 줄이기에 나섰다.
고베제강과 함께 일본 3대 철강 회사로 꼽히던 신일본제철과 스미토모금속공업은 2012년 합병을 통해 재기를 도모했고, 고베제강은 알루미늄·동 등 비철강사업에 집중했다.
성과도 나타났다. 지난해 철강사업은 295억엔(약 2800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했지만 알루미늄·동 사업부문은 120억엔(약 1160억원)의 순이익을 낸 게 단적인 예다. 문제는 주력인 철강사업이 제 역할을 못하는 사이 비철강사업을 대상으로 수익창출 압박이 점점 거세졌고, 서로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나머지 각자 눈앞의 성과에만 급급한 문화가 형성됐다는 점이다.
니혼게이자이와 아사히신문 등에 따르면 고베제강의 한 임원은 "이익확대를 압박하는 목소리가 셌다"며 "이익만 나면 품질 조작따위는 파악하려고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다른 임원은 "종이로 지시하면 증거가 남아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구두로 조작 지시가 오고갔다"라고도 고백했다.
◇ 꽉 막힌 의사소통…망가진 내부시스템
고베제강이 일본 안팎에서 호된 뭇매를 맞자 스스로 잘못을 고백하는 기업들도 등장했다. 타이어코드 제조에 주력하는 도레이 하이브리드코드와 금속제조업에 집중하는 미쓰비시 머터리얼즈는 지난달 말 길게는 6년, 짧게는 반년에 걸쳐 품질 기록을 조작해왔다고 밝혔다.
이처럼 일본 기업들에서 품질 스캔들이 터져 나오는 데에는 기업 내부의 의사소통과 감사시스템이 원활하지 않은 탓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고베제강은 보고체계가 무너져 경영진이 문제의 심각성을 제때 알아채지 못한 사례에 속한다.
권동호 동국대학교 법학과 교수는 "최근 품질 이슈들이 자주 일어나면서 일본 정부가 기업의 내부시스템을 국익과 직결되는 문제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며 "다만 기업마다 내부 감사시스템 구축 정도가 제각각이라 경영자와 투자자, 법원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당장의 획기적인 개선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