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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20대]LG, '인화의 힘' 어디서 나왔나

  • 2019.12.06(금) 15:31

구인회 "동생들 공부시켜야"…사농공상 깨고 세상 속으로
형제들과 사업 함께 일으켜…후계자는 혹독한 경영수업

구인회는 1931년 경남 진주에서 '구인회상점'을 열었다. LG·GS·LS 등의 뿌리가 된 곳이다. 사진 왼쪽은 젊은 시절 구인회.

1931년 스물다섯살의 구인회가 넘어야야할 첫번째 산은 아버지였다. 양반 집안에서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맨 끝단에 위치한 장사를, 다른 이도 아닌 장남이 손 대겠다고 하면 반대할 게 뻔하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아버지 구재서는 펄쩍 뛰었다. 이번엔 할아버지를 찾아가 자신의 뜻을 알렸다. 할아버지 구연호는 임금에게 경서를 강론하는 홍문관 교리로 있다가 쇠락하는 국운과 함께 낙향한 인물이다.

대가족의 장남…젊은날의 책임감
1931년 진주서 '구인회상점' 시작
'형과 함께라면…' 동생들의 도움

"허락해 주신다면 타관에 나가 장사라도 해서 아우들을 공부시키는데 힘이 되고 싶습니다."<한번 믿으면 모두 맡겨라, LG 창업회장 연암 구인회의 삶>

그 시절 구인회에겐 다섯명의 아우(철회·정회·태회·평회·두회)가 있었다. 구인회 자신도 일찍 결혼해 3남1녀(양세·자경·자승·자학)를 두던 때다. 식객을 대접하고 불어나는 식구들의 의식주를 감당하느라 300석 재산이 시나브로 줄어갔다.

"보내야 안되겠나."

며칠 후 할아버지의 한마디에 아버지도 물러섰다. 그러고는 구인회에게 2000원의 사업자금을 건넨다. 쌀 한가마 가격이 10원 안팎이던 당시로선 적지 않은 금액이다.

여기에 첫째 동생 구철회가 마련해온 1800원을 더해 진주에 '구인회상점'이라는 포목점을 열었다. 오늘날 LG·GS·LS 등의 뿌리가 된 곳이다.

1935년 구인회상점 전경./사진= 진주향당 소장. 국립진주박물관

구인회에게 가족은 든든한 후원자일 뿐 아니라 사업의 동지였다. 처음엔 장사를 반대하던 아버지도 구인회가 사업초기 500원의 손해를 입자 가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땅문서를 내주며 자금을 융통하도록 도왔다.

구철회는 자본금을 보태는데 그치지 않고 구인회상점에서 직접 일하며 형과 동고동락했다. 둘째 동생 구정회는 해방 후 형에게 화장품 사업을 소개하고 상호를 '럭키(Lucky)', 한자로는 '락희(樂喜)'로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셋째 동생 구태회는 깨지지 않는 화장품 용기 제조업무를 맡아 구인회가 플라스틱 사업에 뛰어들 발판을 마련해줬고, 넷째 동생 구평회는 오늘날 GS칼텍스가 된 정유사업의 밑그림을 그렸다. 구평회는 5·16 쿠데타가 일어난 1961년 시국의 소용돌이에서 형을 대신해 구속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형 대신 감옥에 갈 수 있었던 구평회의 우애, 그것이 묵시적으로 용인되었던 구씨 가문의 분위기에서 그 집안의 가풍과 가훈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가풍이 럭키그룹의 구심점이 되고 있다는 것은 다른 재벌과 대조되는 현상이다."<경향신문, 1982.6.21>

구인회는 동생들과 자식들을 회사 경영에 참여시켰다. 사진 왼쪽부터 구인회와 넷째 동생 구평회, 장남 구자경, 사남 구자두./사진=LG그룹

사업 참여는 형제들에게 그치지 않았다. 1946년 고향에서 첫손가락에 꼽히는 부자이자 사돈인 허만정이 그의 셋째 아들 허준구를 데리고 찾아왔다. 허씨 일가가 GS그룹으로 독립할 때까지 구씨와 허씨의 58년간 사업인연이 시작된 것도 이 무렵이다. 이듬해 허만정은 구인회가 락희화학공업사를 설립할 때 자본금의 35%를 댔다. 이 비율은 훗날 허씨 일가가 정유·유통·홈쇼핑·건설부문을 가지고 나갈 때 사업을 나누는 기준이 됐다.

스물 넷의 나이에 구인회에게 맡겨진 허준구는 6·25 전쟁 시절 부산에서 화장품 판매대금 수금업무를 맡았고, 전후 미국산 치약이 장악한 시장에선 럭키치약을 팔기 위해 서울 곳곳을 누볐다. 1969년 구인회의 지시를 받아 락희화학 기업공개를 실시해 가족기업이라는 꼬리표를 뗀 것도 허준구의 작품이다.

허준구의 형 허학구와 동생 허신구도 구인회에게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허학구는 구인회의 장남 구자경과 함께 부산 범일동 공장에서 24시간 생활하며 빗이나 칫솔을 만들어 팔았다. 허신구는 남들이 알아주지 않던 합성세제에 주목해 1960년대 초 '하이타이'로 대박을 낸 인물이다.

허만정의 방문…동업의 뿌리
형제·사돈·자식까지 '한솥밥'
아우름의 경영철학 '인화(人和)'

여러 형제와 자식, 사돈 식구까지 한솥밥을 먹으면서 구인회가 유독 신경을 쓴 게 '인화(人和)'다.

1960년대 중반 금성사가 라디오를 중남미에 수출했을 때의 일화다. 1000대 가까운 라디오 케이스에 모두 하자가 있다는 클레임이 들어왔다. 라디오 케이스는 락희화학이 만들고, 금성사는 그걸 조립하고 포장해 출고한다. 제품 하자의 책임을 두고 금성사와 락희화학 임원이 한판 붙었다.

금성사에는 락희의 외부영입 1호 임원인 박승찬(훗날 금성사 사장), 락희화학에는 구자경이 있었다. 박승찬은 플라스틱 케이스를 만든 락희화학에 원인이 있을 것이라고 했고, 구자경은 몇몇 케이스 불량도 아니고 제품 전량이 파손된 것이라면 제품을 만들고 포장을 잘못한 금성사의 문제 아니냐고 따졌다. 언성이 높아지면서 박승찬이 회의실을 나가버렸다. 회의가 끝난 뒤 구인회가 아들을 불러 꾸짖었다.

"봐라, 니가 싸워서 될 일이가? 양보할 건 하고 이해할 건 해야되지 않냐 말이다. 상대방을 그렇게 몰아붙여도 되는 거냐? 덕성있는 경영자는 논쟁하는 가운데서도 항상 인화를 생각해야 한다."

1968년 2월12일 매일경제신문에 실린 인사동정. 금성사 박승찬 전무는 락희화학 부사장, 락희화학 구자경 전무는 금성사 부사장으로 각각 발령났다(노란색으로 표시). 인화를 중시하는 구인회의 경영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박승찬도 따로 불렀다. 그 일이 있고 얼마 뒤 락희그룹 인사가 났다. 구자경은 락희화학에서 금성사로, 박승찬은 금성사에서 락희화학으로 발령이 났다. 제품하자에 대한 문책은 커녕 둘다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각자의 자리를 바꿔주면서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라는 의중이 담겼다.

그 뒤 문제가 된 라디오의 파손사건은 금성사와 락희화학 때문이 아니라 현지에서 서둘러 하역작업을 하면서 발생한 일로 밝혀졌다.

구인회는 인화를 중시하면서도 다음 세대의 중심이 될 장남에게는 희생을 요구했다. 1950년 5월 스물여섯의 나이로 부산사범대 부속국민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구자경은 "교직을 그만두고 내 일을 도우라"는 아버지의 지시를 받았다. 구자경의 회고다.

"그때부터 나에게 맡겨진 일은 고향 선배 한 분과 함께 새벽마다 몰려드는 상인들에게 제품을 나눠주고 낮 동안에는 종일 공장에서 일하다가 밤이면 하루씩 번갈아가며 숙직을 하는 것이었다. 추운 겨울이면 판자방에서 군용 슬리핑백 속에 들어가 몸이 녹을 때까지 잠을 설치곤 했는데 이 생활이 무려 4년 가까이 계속됐지만 창업회장께서는 고생한다는 위로의 말 한마디 없으셨다. 우습게도 그때의 간절한 소망은 창업회장으로부터 칭찬 한마디 들어보는 것이었다." <나의 경영혁신 이야기, 오직 이 길밖에 없다>

1969년 뇌종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기 전 구인회는 아들에게 이렇게 털어놨다.

"너 나를 원망 많이 했제? 기업을 하는데 가장 어렵고 중요한 것이 바로 현장이다. 그래서 본사 근무 대신에 공장일을 모두 맡긴 게다. 그게 밑천이다. 자신있게 키워라."

아버지 구인회의 흉상 옆에 서있는 구자경./사진=LG그룹

당시 구인회 밑으로 창업공신인 남동생 다섯명과 장성한 아들 여섯명이 있기에 그의 사망과 함께 락희그룹에 경영권 다툼이 있을 것이라는 외부의 시각이 적지 않았다. 그 때 나온 신문기사 한토막이다.

"락희재벌은 당분간 창업공신이자 나이가 연만한 철회 씨 등이 총수의 후임을 맡아 재벌을 움직여나가겠지만 오래지 않아 구 회장의 친자계가 핵심세력이 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이 경우 젊은 삼촌 내지 사촌 등의 반발과 독립선언 사태도 예상되지 않는다는 보장을 받기힘들다. 어떻든 이러한 전망 등은 락희재벌의 성장에 장애요소가 되는 것만은 분명하며 이런 의미로 락희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매일경제신문, 1970.1.5>

외부의 우려는 기우에 그쳤다. 1970년 1월6일 열린 시무식에서 구인회 다음의 연장자이자 구인회상점 시절부터 형과 함께 사업을 키운 구철회는 자신의 조건없는 퇴진을 발표하고 조카이자 형의 장남인 구자경을 2대 회장으로 추대했다. 구철회는 한달 전 이 같은 결심을 동생들과 조카들에게 미리 알려 자연스러운 동참을 유도했다.

구인회 사후 승계과정에 어떤 잡음도 없었던 건 인화를 중시한 그의 경영철학과 향후 구심점이 될 인물의 혹독한 훈련과정을 곁에서 지켜봤기에 가능했던 것 아닐까. 이 같은 전통은 구자경에서 구본무(1995년)로, 구본무에서 다시 구광모(2018년)로 경영승계가 이뤄질 때도 작동했다.

구인회는 장남을 너무 엄하게 대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를 들을 때 이런 말을 했다.

"대장간에서는 하찮은 호미 한자루 만드는데도 수없는 담금질로 무쇠를 단련 안하는가. 고생을 모르는 사람은 칼날 없는 칼이나 다를 게 없는 기라."

▲구인회 약력
1907년 경남 진양군 지수면 승내리 출생
1920년 허을수와 혼인
1921년 지수보통학교 2학년 편입학
1925년 장남 구자경 출생
1927년 동아일보 지수지국 개설
1931년 구인회상점 개점
1940년 구인상회로 상호변경
1945년 조선흥업사 설립
1947년 락희화학공업사(現 LG화학) 설립
1953년 락희산업주식회사(現 LG상사) 설립
1959년 금성사(現 LG전자)설립
1962년 한국케이블공업주식회사(現 LS전선) 설립
1968년 락희화학공업사 회장
1969년 호남정유(現 GS칼텍스) 여수공장 준공, 럭키개발주식회사(現 GS건설) 설립,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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