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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화학 ABC]⑤담장이 허물어진다

  • 2019.12.20(금) 08:30

정유사, 화학사업으로 영역 넓혀
화학사, 원료 다변화에 고부가 집중

"사이클이 길어져 어려운 시기가 2023년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최근 정유와 화학업계 종사자들 사이에서 종종 들리는 얘기다.

정유·화학산업은 흔히 '흐름을 타는' 사이클 업종으로 불린다. 곳간이 두둑해지는 호황기, 지갑이 텅 비는 불황기가 2~3년에 걸쳐 번갈아 찾아오기 때문이다. 늘어나는 수요에 맞춰 설비를 짓는데 일정 시간이 소요되고, 이에 맞춰 시장에 공급량이 대거 쏟아지는 시간차가 업체들의 희비를 가른다. 이같은 공식에 대입하면 2018년 말부터 수요부진에 신음하는 국내 정유사와 화학사에게 해 뜰 날은 2020년에서 2021년말로 점쳐졌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상황이 과거와 너무도 달라졌다. 수요가 많아질 때를 대비해 제품을 끓이는 탑과 생산품을 나를 배관을 만드는 것은 과거와 달리 더 이상 유효한 공식이 아니다. 미국과 중국간 무역전쟁으로 인한 수요약세 탓만 하기 어려워졌다. 업계의 판이 뒤집히고 있다.

◇ 강대국 샌드위치 될라

업계가 불황 장기화를 우려하는 가장 큰 이유는 더 견고해져 가는 공급과잉 흐름이다. 설비는 나날이 발전해 한 개당 연간 제품 7만톤을 생산하던 것이 최근에는 10만톤으로 단위당 생산량이 크게 증가했다. 여기에 더해 오랜 업력이 흘러 생긴 기업과 기술진이 쌓은 경험도 무시 못한다. 이들은 전과 달리 더 안정적이고 효율적으로 설비를 돌려 이전보다 더 시장에 제품이 차고 넘치도록 부추긴다.

미국, 중국 정유·석화 '굴기'
저렴한 원료비 더해 대규모
시장 벌써부터 공급과잉 몸살

제품구매에 기꺼이 돈을 지불하던 이들이 직접 제품 생산에 나서는 구조적 요인도 업계를 서서히 죄어오고 있다.

중국은 최근 정유와 화학부문 자급자족을 넘어 수출국을 향해 뛰고 있다. 중국 정유설비 하루 정제능력은 2004년 700만배럴에서 지난해 1565만배럴로 두배 이상 껑충 뛰었다. 세계 2위 규모다.

만성적 공급부족에서 쓰고 남아도는 상황에 이르러 2015년부터 휘발유, 경유 등 석유제품 순수출국으로 변신했다.

경제가 급속히 성장해 인민들이 입을 옷이 더 필요해 합성섬유 중간원료 파라자일렌(PX) 대규모 신증설에도 나서는 중이다. 올해만 이미 만들어진 헝리의 연산 450만톤 서비를 포함해 신증설될 PX 설비가 연산 1770만톤에 이를 전망이다. 국내 연간 생산능력 1051만톤의 1.7배에 이른다.

'큰손' 중국이 경쟁자로 부상하는 것은 국내업계에게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중국시장은 1992년 한・중수교로 문이 열린 이래 국내 정유사와 화학사의 현금 창출원으로 자리 잡았다. 두 업계가 중국에 제품을 팔아 손에 쥐는 매출은 한 해 총액에서 10% 중후반, 40%대를 차지했다. 단일 시장으로는 최대 규모다. 정유업계의 실적효자 합성섬유에 쓰이는 중간원료 파라자일렌(PX)은 중국 수출 의존도가 90%가 넘는다.

벌써부터 시장은 재채기를 하고 있다. 정유사 정유부문 수익성 지표 싱가포르 복합정제마진은 지난달 셋째주와 넷째주 -0.6달러, -0.9달러를 각각 기록했다.

석유제품 가격에서 원재료비, 운송비 등을 뺀 정제마진이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은 18년여만에 처음이다. 연말 수출 한도량을 채우기 위해 휘발유 물량을 밀어내면서 시장이 소화불량에 걸린 것으로 업계는 분석한다. 제품을 돈을 들여 만들어 팔아도 되레 손해가 나는 상황이다.

중국의 대규모 설비투자로 글로벌 PX 시장은 이미 휘청거리고 있다. PX 가격은 지난해 10월 1284달러로 고점을 찍었다가 이달 둘째주 들어 815달러로 1년새 36.5% 급락했다.

셰일가스 본산 미국의 기지개도 복병이다. 2010년대 고유가가 판을 깔아 미국 기업들은 땅속 깊은 곳 셰일에 묻힌 셰일가스를 파낼 동력을 얻었다. 셰일가스를 파내면서 덩달아 추출되는 가벼운 초경질유에 힘입어 미국 정유사들이 설비가동률을 끌어 올리고 있다. 올 연초 고부가 휘발유 가격이 값싼 고유황 벙커C유보다 고작 배럴당 3~4달러 높은 것에 그쳤던 것도 미국으로부터 비롯된 공급과잉 때문이다. 통상 휘발유는 선박연료에 쓰이는 고유황중유보다 10달러 이상 높았다.

현지 화학사들도 웃음꽃이 활짝 폈다. 천연가스에서 추출한 에탄을 매개로 에틸렌을 생산하는 에탄 분해설비(ECC) 가동률을 한 껏 끌어올리고 있다. 국제 에틸렌 가격도 매달 꾸준히 하락세다. 에틸렌 등 여러 화학제품에 두루 쓰이는 범용품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 국내 화학사들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롯데케미칼 미국 공장 준공식이 지난 5월 9일(현지시간) 현지에서 열렸다. (좌측부터) 존 벨 에드워즈 루이지애나 주지사, 이낙연 국무총리,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해리 해리슨 주한미국대사, 실비아메이데이비스 백악관 정책 조정관 부차관보/사진=롯데케미칼 제공

한국 기업들이 강대국들에 맞서는 방안은 이들의 전략을 일부 빌렸다. 석유에서 가스로 원료 조달처를 일부 바꾸며 비용절감을 노린다. 여기에 더해 규모의 경제를 더해 이익 극대화도 꾀한다.

국내 구원투수 등판한 천연가스
정유사, 쓰임새 넓히며 화학 '노크'
화학사, LPG 더해 고부가 제품 '속도'

정유업계는 최근 에틸렌을 생산하는 화학사업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다. 중국, 미국 등의 추격으로 포화상태에 직면하는 주력 시장을 최대한 분산해 경쟁력을 모색하려는 자구책이다.

사실 정유사 입장에서 현재 정유산업에서 꺼내들 수 있는 카드는 많지 않다. 유전탐사 등 수직계열체계 더 윗단을 노크하기도 어렵다. 유전은 잘만 확보하면 이득이 되지만, 2010년대 중반 배럴당 100달러가 무너져 상대적으로 유가가 낮은 상황에서 기회비용이 커졌다. 정유사업에서 승부를 보기에는 후발주자들의 거센 추격이 부담스럽다.

이 때문에 80년대 윤활유, 90년대 고도화 설비와 PX로 이어지는 벤젠·톨루엔·자일렌(BTX)을 생산하는 방향족 설비를 지은데 이어 화학업종으로 보폭을 크게 하고 있다. 기존에 에틸렌 원료 나프타를 공급했던 고객사 화학사를 자극할 수도 있는 무리수를 택한 것이다. 현재 국내 정유4사 가운데 에틸렌을 생산하는 나프타 분해설비(NCC)를 보유한 업체는 SK이노베이션이 유일하다.

정유사들은 여기에 더해 기존 석유화학이 아닌 가스화학에 좀 더 다가가는 변화를 줬다. 미국 화학사들이 보유한 ECC의 저렴한 원가 경쟁력을 모방하려는 전략이다. 한국수출입은행에 따르면 ECC 톤당 마진은 NCC 대비 250달러 가량 높다.

첫 신호탄은 GS칼텍스가 쐈다. GS는 올해 전라남도 여수 제2공장 인근 약 43만㎡ 부지에 총 2조6000억원을 투자해 2022년까지 에틸렌 연간 70만톤, 폴리에틸렌 연간 50만톤을 생산하는 설비공사에 들어간다. 시설명은 NCC의 일종인 복합원료 분해설비(MFC)다. 천연가스에서 여러 과정을 거쳐 뽑히는 액화석유가스(LPG), 원유 정제과정서 추출되는 값싼 부생가스를 NCC 대비 더 많이 원료로 투입할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미국으로부터 비롯된 셰일가스 혁명으로 천연가스 가격이 워낙 싸진 만큼, 저렴하게 천연가스서 추출되는 LPG를 바탕으로 원가 경쟁력을 한껏 끌어올리기 위한 목적이다.

현대오일뱅크와 S-OIL도 중질유분 분해설비(HPC), 스팀 분해설비와 올레핀 다운스트림(SC&D)으로 이름은 다르지만 NCC 설립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각 사업은 2021년까지 2조7000억원, 2024년까지 5조원 이상이 투자된다.

화학사들도 사업 무게축을 나프타에서 조금씩 천연가스로 이동 중이다. 한화토탈이 2년여간 5400억원을 투입해 충남 대산공장에 세운 '가스 전용 분해설비(NCC Side Cracker)'는 에틸렌 연간 31만톤, 프로필렌 연간13만톤을 생산하는데 나프타가 아닌 LPG가 100% 원료로 태워진다. LG화학 등 에틸렌 증설에 나서는 여러 국내 업체들도 설비에천연가스 투입비중을 높이도록 밑그림을 짰다고 알려졌다.

롯데케미칼은 적진인 미국 한복판에 가스화학단지를 짓는 등 더 적극적이다. 지난 5월 9일(현지시간) 미국 루지애나주 레이크찰스에 에틸렌 연간 100만톤 등을 생산하는 ECC 단지를 3년여간 31억달러(3조6000억원)를 들여 지었다. 이 단지는 설립 직후 3분기 매출 1410억원, 영업이익이 346억원으로 영업이익률이 24.5%에 달하는 높은 수익성을 달성했다.

◇ 기술장벽 더 높게

SK가 짓고 있는 VRDS 공사현장/사진=SK이노베이션 제공

정유사와 화학사는 원료가격을 줄이는 동시에 더 높은 기술장벽을 쌓아 미국과 중국 현지 기업과 정면으로 맞설 계획도 구상 중이다.

정유사는 석유를 정제하고 남은 찌꺼기를 재활용하는 방안에 주목했다. 고도화 설비는 원유가격에 한참 못미치는 잔사유를 다시 분해하는 고도화 과정을 거쳐 휘발유 등 고부가 제품을 뽑아내 이른바 '지상유전'으로 불린다. 대한석유협회에 따르면 국내 정유업계가 한 번 중질유를 투입해 값비싼 제품을 뽑아내는 비율은 올해 지난해 말 기준 24.5%로 미국(56%), 독일(41.1%) 등 선진국뿐만 아니라 브라질(28.9%) 등 일부 신흥국에도 뒤진다.

SK이노베이션은 2017년말부터 울산 복합설비단지 내 1조원을 투자해 내년 3월 가동을 목표로 고도화 설비를 짓는 중이다. 계획대로라면 하루 3만6000배럴의 선박용 저유황유와 6000배럴분의 경유가 생산된다. S-OIL이 2년여간 5조원을 투자해 올해 6월 준공식을 가진 잔사유고도화설비(RUC)·올레핀하류설비(ODC)는 잔사유를 투입해 휘발유와 화학물질을 뽑고, 이를 기반으로 더 고부가 제품을 만드는 설비다.

현대오일뱅크는 지난해 2400억원을 투자해 고도화율을 높였다. GS칼텍스는 기존 고도화 설비와 함께 공장연료로 쓰던 저유황유를 선박유로 팔며 대응한다.

화학업계는 특화제품 생산에 열을 올리고 있다. 그간 화학업계는 에틸렌 중심 범용 화학제품이 주력으로, 경기변동과 신규 사업자 출현에 따라 실적이 큰 폭으로 오르락 내리락하는 문제점이 지적됐다. 특화제품은 시장규모는 범용제품에 비해 작지만, 경기변동을 크게 타지 않는 강점을 지녔다. 고도의 기술력이 필요해 후발주자가 뒤따라잡기도 어려워 안정적 수익을 보장한다.

롯데케미칼은 특화제품을 중심으로 사업을 재정비 중이다. 지난 6월 22일 완전 자회사 롯데첨단소재를 합병하기로 결의했다. 롯데첨단소재는 자동차 내장재 등으로 쓰이는 고부가 플라스틱(PC), 핸드폰 등 전자기술기기 외관에 들어가는 폴리카보네이트(PC) 등이 주력이다.

여기에 더해 GS에너지와 손잡고 2023년까지 총 8000억원을 투자해 연간 특화제품 생산에 가속도를 붙인다.

한화케미칼도 자회사 한화큐셀앤드첨단소재와 내년 1월1일 합병해 한화솔루션으로 간판을 바꾼다. 한화큐셀앤드첨단소재는 가벼우면서 마모가 덜 되는 엔지니어링 플라스틱(EP) 등이 주력이다.

금호석유화학은 자회사 금호피앤비화학을 필두로 2021년까지 비스페놀에이(BPA) 20만톤 증설에 나선다. BPA는 PC에 쓰인다. 의료용 장갑 등에 쓰이는 특화고무 NB라텍스 증설 등에도 힘을 쓰고 있다. LG화학은 고부가 제품 매출비중을 2022년까지 20% 초반에서 30%대로 끌어올릴 계획이다.

화학업계 관계자는 "결국 수익성을 높이면서 동시에 기술력을 키우는게 생존의 길"이라며 "정유사와 화학사들이 내실을 튼튼히 하며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려 분투중"이라고 말했다. [시리즈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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