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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 길을 묻다]뿌리째 흔들릴라

  • 2020.06.09(화) 09:56

[비즈니스워치 창간 7주년 기획 시리즈]
집중투표제 도입 가시화...투기자본 먹잇감 우려 확산
포이즌 필·차등의결권 등 경영권 방어수단도 있어야

한국 산업이 미증유(未曾有)의 위기에 빠졌다. 미국과 중국간 갈등 및 보호무역 강화, 후발주자 추격 등은 수출중심으로 성장해온 한국 산업에 큰 충격을 안겨주고 있다. 여기에 코로나19라는 거대한 돌발변수는 그 영향을 배가시키는 상황이다. 국내 굴지 기업들마저 존망을 걱정해야 할 처지다. '위기가 기회'라는 말처럼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해 강점(strength)은 '살리고' 약점(weakness)은 '보완하며' 기회(opportunity)를 '잡고' 위협(threat)은 '대비해야'만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 시점이다. 한국 산업이 처한 다양한 상황에 대한 진단과 대안을 4편에 걸쳐 제시해 보고자 한다.[편집자]

# 세계적인 기업 사냥꾼 칼 아이칸은 지난 2006년, KT&G의 주식 6.59%를 확보하며 2대 주주로 올라섰다. 이후 주총에서 집중투표제 도입을 관철시킨 뒤 이사회에 진입, 경영진에게 유휴 부동산과 자회사 매각, 고액 배당 등을 끈질기게 요구했다.

하지만 사측이 자신들의 요구에 따르지 않자, 칼 아이칸은 적대적 M&A 카드를 빼들어 경영진을 압박했다. 그 결과 KT&G는 부동산을 제외한 자회사 매각과 2조8000억원이라는 거금을 배당금으로 써야 했다. 그리고 그 해 12월, 칼 아이칸은 124억원의 배당금, 1358억원의 주식매각 차익을 챙겨 한국을 떠났다.

# 지난 2018년,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엘리엇)는 현대차 계열사 3곳(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의 주주로 올라서자마자 3사에 집중투표제 도입을 요구했다. 자신들의 추천 인사를 이사회에 투입해 보다 직접적인 경영 참여를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엘리엇은 현대차그룹이 추진 중인 '지배구조 개선안'에 반대 의사를 표하는 등 노골적인 경영권 간섭을 예고했던 상황. 현대차그룹이 주총 표대결에서 승리했기에 다행이지, 패했다면 국민차 기업 현대차가 해외 투기 자본에 휘둘리는 '흑역사'를 남겼을 수도 있다.

외국계 자본이 국내 기업 시장에 유입되기 시작한 건 1997년 IMF(외환위기) 이후부터다. 구제 금융을 지원받는 대가로 자본시장을 개방하면서 외국 펀드들의 자본투자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특히 총수 일가가 적은 지분으로 그룹에 막강한 지배력을 가지는 국내 대기업들의 후진적 지배구조는 해외 투기 세력들에 종종 먹잇감이 됐다.

그때마다 집중투표제는 투기 세력들이 기업 경영권에 개입하는 진입로 역할을 해왔다.

※ 집중투표제: 주주총회에서 이사를 선출하는 방법중 하나. 각 주주는 선임할 이사 수에 자신이 보유한 주식의 수를 곱한 만큼 의결권을 가지는 제도다. 예를 들어 5명의 이사를 선출할 때 1만주를 가진 주주들의 의결권은 5만주가 된다. 이들이 의결권을 한데 모아 특정 이사 후보에게 몰표를 던질 수도 있다.

이들은 타깃 기업이 정해지면 일정 규모의 지분을 사들인 뒤 경영진에 집중투표제 도입부터 요구했다. 집중투표제만 도입되면 자신들의 인사를 이사회에 진입시키는 게 한층 수월하기 때문이다.

이전까진 주주로 그저 주총 때 찬반 표 대결에만 참여했다면, 이사회 구성원으로, 회사 경영의 핵심적인 사안들에 직접적인 참여가 가능하다. 단순 '경영 참여' 수준에서 기업 지배권을 노린 전면적인 공격에도 나설 수 있다.

다행히 아직까지 이런 사례가 없었던 건 기업이 자율적으로 집중투표제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현행법은 주주제안으로 집중투표제를 청구하더라도, 기업들이 정관에서 이를 배제할 수 있도록 돼 있다. 현대차그룹이 엘리엇의 맹공에도 경영권 타격을 최소화할 수 있었던 배경이다.

하지만 앞으론 기업 고유 권한인 경영권이 외국계 자본에 넘어가는 일이 종종 일어날 수 있다. 지금껏 기업 자율에 맡겼던 집중투표제가 법적으로 의무화 될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집중투표제의 근간인 경제 민주화를 주요 정책 기조로 내건 현 정부가 지난 4월 총선에서 거대 여당이 된 더불어민주당의 힘을 빌어 경제 민주화 관련 법안들을 속전속결로 밀어부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최근 오너들의 잦은 사법리스크로, 재벌 개혁이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된 점도 정부의 이런 행보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재계 "기업 지배구조 개선 아닌 투기 세력 놀이터 될 것"

기업들은 비명을 지른다. 코로나 사태의 장기화로 당장 먹고 살기도 팍팍한 데 경영권 위협까지 받게 생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성장 동력 확보에 투입해야 할 돈을 경영권 방어에 쓰게 생겼다고 하소연한다.

재계는 집중투표제가 선의(善義)로만 활용된다면, 소액주주들의 권한이 강력해지는 것과 동시에 독립적이고, 객관화된 이사회 구성을 기대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한다.

하지만 그 소액주주가 투기 세력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기업이 이들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장기적 플랜보단 단기 수익 극대화에만 초점을 맞춰 경영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계 관계자는 "소규모 지분으로 오너의 그룹 경영권 장악을 막기 위해 도입한 집중투표제가 오히려 해외 투기 세력이 적은 지분으로 그룹에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는 빌미를 주게 됐다"고 토로했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도 의견이 갈린다. 과거 소액주주 운동을 펼친 바 있는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과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등 '참여연대파'는 집중투표제 도입으로 재벌을 견제할 수 있다는 입장이다.

반면 장하준 영국 케임브리지대 경제학부 교수나 정승일 민주노총 정책연구소장 등은 이 제도가 기업의 장기적 발전보다 단기 수익을 극대화하는 투기 세력에 좌지우지 될 거라며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렇다면 해외는 어떨까. 미국은 1940년 애리조나 등 22개 주(州)에서 집중 투표제를 강제 규정으로 도입했지만, 경영자 갈등이 빈번하게 일어나자 1950년대 이후 이를 자율로 전환했다. 일본 또한 집중투표제 도입 후 주주간 경영권 분쟁이 끊이지 않자, 1974년 상법 개정을 통해 집중 투표제 의무화를 폐지했다.

현재 전 세계에서 집중투표제를 법제화한 곳은 러시아, 맥시코, 칠레 등 세곳 뿐이다.

집중투표제가 의무화 될 경우 당장 타격이 예상되는 곳은 행동주의 사모펀드 KCGI-반도건설-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 등의 '3자 연합'과 경영권 분쟁 중인 한진칼이다.

'3자 연합'의 몰아주기가 가능해지면서 이들의 추천 인사의 이사회 진입이 가능해진다. 3월 주총 이후 침묵하던 3자 연합이 다시 한진칼 지분을 사들이며 공격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 역시 집중투표제 의무화를 염두한 행보란 관측이 가능하다.

물론 3자 연합은 장기적이고 전략적인 투자를 표방하며, 단기 수익이 우선인 다른 행동주의 펀드들과의 차별점을 내세운다. 그러나 그들 역시 수익에 중점을 둘 수 밖에 없는 사모펀드라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김화진 서울대 로스쿨 교수는 자신의 저서 '소유와 경영'을 통해 "소니의 최대주주인 헤지펀드 업체인 서드포인트도 허브라이프에서 장기 투자를 표방하다 16일만에 철수한 전례가 있다"며 "행동주의 펀드들이 아무리 전략적인 제안을 내놓고 기업지배구조에 관여한다고 해도 결국 궁극적인 목적은 투자 수익 시현"이라고 지적했다.

◇포이즌 필·차등의결권·日 '엘리엇 방지법' 대안 가능성

집중투표제 의무화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라면, 기업 스스로 경영권 방어 체력을 키우는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현 시점에서 대기업이 외부 공세를 막아낼 방법이라곤 지분매입과 우호지분 확보 등이 고작이다.

일각에선 선진국처럼 대주주 경영권을 보호할 최소한의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포이즌 필(poison pill), 차등(差等)의결권, 황금주 등이 대표적인 대안으로 거론된다.

포이즌 필은 외부로부터 적대적 인수합병(M&A)이나 경영권 침해 시도가 있으면 기존 주주에게 시세보다 훨씬 싼 가격에 지분을 매입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다. 대주주는 안정적으로 경영권을 확보할 수 있어 외부 공격에도 경영에 집중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미국에선 소더비, 허츠, JC 페니, 세이프웨이, 아메리칸어패럴, 에너자이저 홀딩스 등 많은 기업들이 포이즌 필로 경영권을 방어하고 있다. 일본은 2005년 '신주예약권'이라는 일본식 포이즌 필을 도입하고 있다.

차등의결권은 의결권을 더 많이 가진 주식을 허용하는 제도다. 구글의 경우 모회사 알파벳은 주식을 주당 1표의 의결권을 갖는 보통주 A형과 래리 페이지, 세르게이 브린, 에릭 슈밋 등 공동 창업자가 보유한 B형으로 나누고 있다.  B주에는 주당 10표의 의결권이 부여돼 A형보다 10배 많은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다.

차등의결권이 도입되면 한 주만 있어도 주총 의결사항에 절대적 거부권을 행사하는 황금주 발행도 가능하다.

물론 이같은 대안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포이즌 필의 경우 M&A 시장이 왜곡될 수 있고 자칫 대주주 배불리기에 악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차등 의결권이나 황금주도 주주 간 평등권을 지나치게 침해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일각에선 해외 자본이 주요 상장기업의 주식을 1% 이상 인수하려고 할 때 정부의 사전심사를 받도록 한 일본의 엘리엇 방지법 도입을 주시하고 있다. 즉 기업들이 외부 세력에 휘둘리지 않도록 정부가 보호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는 미국이나 중국 자본이 코로나19로 주가가 급락한 자국 기업을 인수·합병(M&A)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미국 및 유럽 조치와 궤를 같이 한다. 일본은 이같은 개정 외환법으로 행동주의 펀드의 기업 공격이나 주주제안을 원천봉쇄하고 있다.

재계 관계자는 "외국은 자국 기업을 보호하기 위해 여러 장치들을 두고 있는데 반해 우리는 경영권 방어 시스템 구축에 소극적"이라며 "포이즌 필이나 차등 의결권, 일본의 엘리엇 방지법 등이 근본적 대책이 되긴 어렵지만, 이들의 제한적 허용하는 등의 정부와 재계의 절충안이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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