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이 내린 결정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꼽고 싶은 게 있다.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짓는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의 높이를 105층에서 50층으로 낮추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그가 준 강한 인상은 적지 않다. 최근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위기속에서도 밀어붙인 공격적인 투자도 강렬했다. 작년말 현대차그룹이 로봇 개발 회사 보스턴 다이내믹스를 인수할 때 그는 사재 2390억원을 투자했다. 가능성만 보고 인수한 1000억원대 적자 회사에 대한 그룹의 투자 리스크를 나누어 짊어 진 것이다.
2015년 과감히 독립 브랜도로 출범한 제네시스는 지난해 판매량 10만대를 돌파했다. 임직원의 노력으로 이룬 성과지만 6년 전 출범 때 밝힌 "도전해야 변화할 수 있고 바뀌어야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는 그의 결정이 없었다면 고급차 시장은 여전히 수입차의 '놀이터'로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리콜 결정도 과감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가솔린 직분사 엔진인 세타2에 대해 3조3900억원, 올해 들어선 전기차 코나의 리콜에 대해 4255억원의 품질비용을 반영했다. 품질비용만큼 손익은 깎였지만 망설이지 않은 리콜 선택은 시장 신뢰 회복에 디딤돌이 됐다.
다른 경영성과보다 GBC 건물 높이를 낮춘 결정에 더 높은 점수를 주는 것은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실리를 추구하겠다는 그의 의지가 느껴져서다.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보다 익숙한 것을 버리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GBC는 그의 부친 정몽구 명예회장이 "그룹의 새로운 100년의 상징"이라고 치켜세운 곳이다. 2014년 부지매입비용으로만 그룹 돈 10조5500억원이 투입됐다. 처음 계획대로 추진되면 GBC는 제2롯데월드를 제치고 국내 최고층 건물이 된다.
하지만 정 회장은 명예보다 실리를 택했다. GBC가 부친의 숙원사업이란 점에서 더욱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업계에선 현대차그룹이 높이를 포기하면서 수 조원대 공사비를 아낄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의 속 마음은 어떨까. 그는 정말 실리주의자일까. 최근 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내놨다.
지난 16일 열린 온라인 타운홀미팅에서 정 회장은 여러 차례 '자존심'을 언급했다. 품질 관련 악성 루머에 대해 적극적인 대응이 필요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저도 루머, 유튜브, 블로그, 댓글도 많이 보고 있다. 우리에게 도움이 되는 건 뭐든 받아들여야 된다. 거기엔 자존심도 필요 없다." 사업에 도움이 된다면 악성 루머도 수용하겠다는 극단적인 실리주의다.
타운홀미팅 끝 무렵에 그는 다시 한번 '자존심이 없다'고 말했다. "고객을 위해서 뭐든 잘 하려고 하는 분들은 도와드리고 싶다. 저는 그런 부분에 대해선 자존심도 없다."
지난해부터 재계 총수를 만나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닌 것도 이 같은 이유일 것이다. 그는 삼성SDI 천안사업장에서 이재용 삼성 부회장을, LG화학 오창공장에서 구광모 대표를, 경북 포항 포스코 청송대에서 최정우 회장을 만났다. 사업을 위해 만나야 될 사람이 있다면 어디서 만날지를 두고 쓸데없는 데 자존심을 내세우지 않은 셈이다.
그는 이어 질문을 던졌다. "큰 자존심을 위해선 언제나 작은 자존심을 희생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문자답은 명쾌했다. "우리 식구들이 잘 되게 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쏟아붓겠다." 식구를 위해서 자존심을 버리겠다는 정 회장의 다음 행보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