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 단위 영업은 가능하나, 특정 지역 사업자들이 반대하면 안 된다"
현대차와 기아가 중소벤처기업부 허가 전후로 중고차 판매 시장 진출을 공식화했지만, 중기부가 허가와 동시에 제시한 부대의견 탓에 현대차그룹의 중고차 사업은 시작도 못하는 상황을 간단히 요약하면 딱 이렇습니다.
허락인듯 아닌듯
사연은 이렇습니다. 지난달 중기부는 '생계형 적합업종 심의위원회'를 열고 중고차 판매업을 생계형 적합업종으로 미지정했다고 밝혔습니다.
현대차·기아 같은 대기업의 중고차 판매업이 허용된 것이죠. 이런 까닭에 현대차와 기아는 정부 발표 전후로 구체적 사업 계획과 함께 기존 중고차 업계와의 상생안도 내놨습니다.
하지만 중기부가 중고차 매매업을 생계형 적합업종으로 미지정하면서 제시한 부대의견이 변수가 되고 있습니다.
"현대차와 기아가 중고차 시장에 진출하면 중소기업·소상공인의 피해가 충분히 예상되므로 향후 '중소기업사업조정심의회'에서 이러한 점 등을 고려해 적정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게 해당 부대의견인데요.
한국자동차매매사업조합회와 전국자동차매매사업조합연합회가 지난 1월 '사업조정'을 신청했기 때문에 이같은 부대의견이 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사업조정은 대기업이 사업을 인수·개시·확장하면서 해당 지역·업종의 중소기업의 경영 안정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거나 미칠 우려가 있는 경우, 정부가 대기업에게 일정기간 사업의 인수·개시·확장을 연기하거나 품목·시설·수량 등을 축소하도록 권고하는 제도입니다.
대기업이 중소기업 적합업종 심의위를 거쳐 전국 단위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아도 특정 지역 중소기업·소상공인이 반대하면 계획했던 사업에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대기업 입장에선 이중 규제이고, 반대의 입장에서 보면 이중 보호막인 셈입니다.
정부 허용사업, 지역서 반대하면 '보류'
사업조정의 실제 사례를 볼까요. 기업형슈퍼마켓(SSM)이나 쇼핑몰이 특정 지역에 진입할 때 현지 소상공인들의 피해가 우려되면 중기부가 사업조정심의회를 열고 다양한 권고를 내놓았던 게 흔한 사례로 언급되는데요.
지난해 9월 중기부는 사업조정 심의회를 열고 '신세계사이먼 제주 프리미엄 아울렛'에 대해 사업조정을 권고한 바 있습니다.
사업조정에는 통보일로부터 3년간 제주칠성로상점가진흥사업협동조합 등이 판매하는 브랜드와 중복되는 브랜드 판매 제한, 대중매체 홍보 연 4회 제한, 명절 판촉 행사 제한 등입니다. 상당히 디테일한 조정이 이뤄졌네요.
대기업 진출이 쉬운 지역도 있다고 합니다. 신도시 같은 곳인데요. 반대하는 중소기업이나 소상공인이 현지에 없기 때문이죠. 마트가 특정 지역에 진입한다고 멀리 떨어진 지역에 미칠 영향도 적습니다.
그렇다면 중고차는 어떨까요. 중고차 사업자가 없는 곳에 들어가서 팔면 되는 것일까요. 3000만원짜리 중고차가 어느 지역에선 2000만원에 팔린다면 사러 가지 않을까요.
현대차와 기아가 지난 1월 경기도 용인시와 전라북도 정읍시에 각각 자동차 매매업 등록 신청을 했을 때, 기존 중고차 업계가 곧장 사업조정을 신청한 게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현대차그룹이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허가 가능성, 현지 업체의 반응을 동시에 테스트한 것이란 판단에 따라 즉각 대응했다는 얘기입니다.
전국자동차매매사업조합연합회 관계자는 "현대차, 기아가 1월에 자동차 매매업 등록을 각각 용인과 정읍에서 시도한 것이 샘플링을 통해 구멍을 뚫으려는 시도로 봤다"며 "그래서 생계형 적합업종 심의위가 열리기 전인 1월에 사업조정 신청이란 카드를 일찍 꺼내 썼다"고 설명했습니다.
팽팽한 대립각
중기부는 사업조정 심의위 개최 이전에 자율조정을 진행했습니다. 지난 2월부터 당사자간 자율조정은 두 차례, 민간위원이 참여하는 자율사업조정협의회는 네 차례 열렸다고 합니다.
자율조정이 이뤄지면 사업조정 심의위는 열리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양사의 의견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어 조정이 쉽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렇다고 대안 제시가 없었던 건 아닌데요. 현대차와 기아는 앞서 △5년·10만km 이내 중고차 판매 △이외 물량은 기존 매매업계에 경매 등을 통해 공급 △중고차 통합정보포털 공개 △중고차 종사자 교육지원 등의 상생안을 내놓았습니다.
자체적으로 시장 점유율을 제한하는 방안도 공개했죠. 현대차는 올해 2.5%, 2023년 3.6%, 2024년 5.1%이고요. 기아는 올해 1.9%, 2023년 2.6%, 2024년 3.7%입니다.
반면 중고차 업계는 자신들이 경쟁력·자생력을 갖추기 전까지 2~3년간 사업 개시를 연기하고, 그 이후에도 최대 3년간 매입 및 판매를 제한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런 요구가 나온 배경은 무엇일까요.
현대차그룹이 중고차 '판매' 점유율을 스스로 제한하는 상생안을 내놨지만, 중고차 '매집'에는 이런 제한이 없기 때문이랍니다. 현대차와 기아가 5년·10만km 넘는 자사 차량을 대거 매집해 기존 중고차 업체에 되팔면, 기존 업체들의 이익이 줄어든다는 겁니다.
전국자동차매매사업조합연합회 관계자는 "우리도 인증 중고차 상품 등을 만들어 대비하고 있으니, 이런 무기를 만들 때까지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라며 "현대차와 기아가 중고차 매물을 독점하면 물량을 갖고 시장을 휘두를 수 있다"며 우려했습니다.
중기부에 따르면 현대차와 기아는 이들의 요구에 대해 '절대 불가'하다는 입장이라고 합니다.
중기부 심의위 판단은
끝내 자율조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사업조정 심의위가 열려야 할텐데요.
문제는 제도상 중기부는 신청인이 사업조정을 신청한 날로부터 1년 내 결론을 내야 한다는 점입니다. 달리 말하면 1년을 질질 끌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1년이 지난 뒤 1년을 추가하는 것도 가능하므로, 최악의 경우 2년 뒤에 결정이 날 수도 있습니다.
또 사업조정 심의회는 중소기업의 사업기회 확보를 위해 3년 이내에서 기간을 정해 인수‧개시‧확장 시기를 연기하거나, 생산 품목‧수량‧ 시설 등을 축소할 것을 권고할 수 있습니다. 3년이 지나 3년을 또 추가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런 숫자를 더하면 최장 8년 동안 사업 진출이 막힐 수도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진 않았습니다. 일단은 중기부가 5월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취임, 6월 지방선거까지 눈치를 볼 것이란 관측이 업계에서 나왔던 이유입니다.
그런데 중기부는 이달 말 사업조정 심의회를 개최해 결론을 내린다고 21일 밝혔습니다. 서로 입장차가 좁혀지지 않기 때문이라는데요. 대통령이 바뀌기 전 시점을 특정한 것에 관심이 모입니다. 중기부 심의위는 어떤 결정을 할까요.
익명을 요구한 정부 관계자는 "중고차는 경계선에 서 있다"며 "중고차 판매업에 종사하는 소상공인의 피해, 중고차 소비자의 편익을 모두 감안해야 하는 사안"이라고 설명했습니다.
현대차 관계자는 "생계형 적합업종 미지정으로 사업 진출에 문제가 없는데, 좀 더 지켜봐야 하는 상황이 됐다"며 "정권 이양기인 까닭에 정부, 지자체에서 어떻게 나올지 알 수는 없으나 사업과 관련한 모든 절차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