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증시는 명실상부한 세계 최대 주식시장이다. 애플과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MS), 테슬라, 페이스북 등 이름만 대면 알만한 글로벌 기업들이 서로 자기 가치를 뽐내는 꿈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 거대한 시장에 최근 'K-머니' 바람이 거세다. 서학개미들의 투자 러시에 이어 국내 최대 이커머스 기업 쿠팡을 필두로 국내 비상장 기업들의 본격적 진출 움직임이 감지되고 있다. 열풍을 넘어 대세가 된 미국 증시. 어떤 점이 한국 투자자와 기업들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조명해보고자 한다. [편집자]
쿠팡의 성공적인 뉴욕행은 국내 기업들에 상징적인 이정표 역할을 하고 있다.
쿠팡이 미국에 본사를 둔 쿠팡LCC의 국내 법인이어서 이번 상장이 한국 기업의 뉴욕증시 진출로 보기 어렵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쿠팡에 국내에서 사업을 영위하고 있다는 점에서 여건만 된다면 해외 기업공개를 추진하는 기업들이 그만큼 많아질 것으로 보인다. 최근 뉴욕행이 점쳐지고 있는 마켓컬리와 야놀자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에 따라 국내 증시의 매력을 꾸준히 높이지 않으면 중장기적으로 국내 우량기업들을 미국시장에 뺏길 가능성이 커질 것이란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당장 절대적인 시장 규모를 따라갈 순 없지만 주요 기업들이 국내 시장을 선택할 수 있도록 적절한 당근을 제시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특히 김범석 쿠팡 이사회 의장이 뉴욕행을 선택한 배경 중 하나로 꼽히는 '차등의결권'이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 우량기업 붙잡으려면 다양한 당근 필요
최근 쿠팡은 뉴욕증시 상장으로 약 5조원의 신규 자금을 유치하는 데 성공했다. 쿠팡이 후한 몸값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뉴욕증시와 국내 증시의 주가수익비율(PER) 격차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PER은 현재 주가를 주당순이익으로 나눈 투자 지표로, 주가가 주당순이익의 몇 배인가를 나타낸다.
이달 초 기준으로 뉴욕증시의 대표 종목으로 구성한 S&P500지수의 PER은 44.63배에 달한 반면 코스피 대표 종목으로 구성한 코스피200은 28.93배에 그쳤다. 같은 기업이라도 뉴욕증시에 상장하면 그만큼 더 높은 가치를 더 인정받으면서 더 많은 자금을 조달할 수 있게 된다는 얘기다.
황세운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단적으로 PER만 비교해봐도 한국과 미국의 격차가 아직까지 상당한 수준"이라며 "주가순자산비율(PBR) 등의 전통적인 평가지표로 비교해도 가격차가 날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쿠팡 건을 계기로 기회만 된다면 뉴욕행을 택하는 기업들이 계속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쿠팡의 성공적인 상장 이후 마켓컬리와 야놀자 등 대형 유니콘들의 뉴욕행이 거론되고 있는 이유도 이때문이다.
그러면서 뉴욕행을 선택하는 우량기업들의 발길을 붙잡으려면 다양한 당근책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특히 차등의결권이 화두가 되고 있다.
차등의결권은 '1주(株) 1의결권' 원칙에 예외로 둬서 대주주가 보유한 주식에 대해 보통주보다 더 많은 의결권을 부여하는 제도를 뜻한다. 이번에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한 쿠팡의 경우 주식 종류를 보통주에 해당하는 클래스A와 더 많은 의결권이 인정되는 클래스B로 나눴는데, 클래스B는 A 대비 29배나 많은 의결권을 갖고 있다. 클래스B 주식을 한주만 가지고 있어도 29주의 클래스A를 보유하게 되는 셈이다.
◇ 차등의결권 만능열쇠 아니지만 분명한 메리트
차등의결권은 우리나라 상법 369조에서 정하고 있는 '의결권은 1주마다 1개로 한다'는 원칙에 반하는 제도지만 세계 각국에선 우량기업들을 유치하기 위해 이와 같은 혜택을 제공하고 있다.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사인 ISS(Institutional Shareholder Services)에 따르면 미국 러셀3000 구성 종목 중 약 7%에 해당하는 기업들이 복수의 클래스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여기에는 마크 저커버그의 페이스북을 비롯해 워런 버핏 소유의 버크셔 해서웨이, 구글의 모회사 알파벳 등이 포함돼 있다.
국가를 기준으로 보면 미국(NYSE, 나스닥), 독일, 일본 등 주요 금융선진국에서 차등의결권을 허용하고 있다. 아시아에서도 2018년 알리바바 사태를 계기로 홍콩이 도입했고, 싱가포르, 중국, 일본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고 있는 등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약 3분의 2가 차등의결권을 용인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도입 논의가 활발하다. 정부는 정권 초기부터 차등의결권 도입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 2018년 벤처기업에 한해 최대 10개의 차등의결권을 인정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 개정안'을 발의했고, 2019년 3월에는 비상장 벤처기업 대상 차등의결권 허용 검토안을 발표 한 바 있다.
하지만 정부의 의지와는 달리 관련법은 아직까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여당은 당초 올해 2월 중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 개정안'을 처리한다는 계획이었지만 산업통상자원중소벤처기업위원회 소속 일부 의원들의 반대에 막혀 상임위원회조차 통과하지 못했다. 무능력하거나 부도덕한 경영진의 부당한 경영권 방어와 세습을 위한 특혜가 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다.
증권업계 관계자는 " 차등의결권 제공이 국내 유망 기업들을 붙잡을 수 있는 만능열쇠는 아니다"면서 "다만 같은 조건이라면 높은 밸류에이션에 따른 더 큰 규모의 자금 조달은 물론 경영권 방어에도 용이한 차등의결권을 허용하는 뉴욕증시가 당연히 선택의 우위를 점할 수밖에 없다"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