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자 사과문, 1800자 경위서

  • 2013.05.30(목) 18:39

사과한다는 것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미안함을 드러내는 행위다. 진실하고 정성스러운 자세로 용서를 구해야 사과받는 이의 아픔이 가시고 상처도 아문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정성이 녹아 있어야 한다.

 

사회 고위층이나 내로라하는 기업 최고경영진이 대중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윤창중' '라면 상무' '빵 회장' '남양유업' 등 소위 을(乙)에게 갑(甲) 행세를 하려다 큰코다쳤던 사건이다. 갑들은 걷잡을 수 없이 퍼지는 여론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몸을 낮췄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도 사과 행렬에 동참했다. 아들을 이른바 귀족학교라 불리는 국제중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떳떳지 못한 방법을 동원한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아서다. 이 부회장 아들은 올해 영훈국제중학교에 '사회적 배려자 전형'으로 입학해 논란을 일으켰다. 입학 과정에서 학교측이 성적을 조작했다는 의혹도 나온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이 부회장은 지난 30일 사과문을 그룹 홍보실을 통해 출입 기자들에게 돌렸다. 아들 학교 문제로 물의를 빚어 죄송하다는 내용이다. 부친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처럼 외부에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이 부회장이 직접 사과문을 작성했다는 점에서 이례적인 일이다. 

 

이 부회장 사과문은 총 4개 문장으로 이뤄졌다. 200자 원고지에 옮기면 1장 조금 못 미치는 분량으로 글자 수도 106자(字)에 불과하다. 글 마지막에 쓴 날짜와 자신의 이름까지 더하면 131자로 단문메시지(SNS) 트위터의 글자수 한도(140자)에 겨우 닿는다. 사과문이라고 하기엔 분량이 짧다. 무조건 길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천천히 읽어봐도 채 1분이 안 되는 사과문에서 진정성을 느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공교롭게도 이날 삼성그룹에선 또 다른 형태의 '사과문'이 나왔다. 이 회사 이수형 전무가 페이퍼컴퍼니(유령 회사) 설립자 명단에 포함된 것과 관련해 삼성그룹 홍보실이 당사자로부터 경위서를 전달받아 기자들에게 뿌린 것이다. 

 

독립매체 뉴스타파에 따르면 이 전무는 '에너지링크 홀딩스 리미티드'란 페이퍼컴퍼니의 등기이사로 등재돼 있었다. 이에 대해 이 전무는 1843자 분량의 경위서를 작성했다.

 

이 전무는 이 회사가 페이퍼컴퍼니인 줄 몰랐고 이 곳에 투자하거나 대가를 받은 적이 없다고 밝혔다. 지인이 사업을 같이 하자고 해서 여권번호와 영문 이름을 알려줬을 뿐이지 무슨 사업을 했는지는 전혀 모른다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해명이다.

 

경위서에서 이 전무는 이번 일이 삼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하이라이트는 "특히 저의 뜻과 무관하게 삼성에 누를 끼쳐 죄송하고, 면목 없다"는 마지막 부분이다. 이 전무는 자신의 억울함을 밝히기보다 행여 삼성이 피해를 입지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이 더 커 보인다. 경위서라기 보다 사실상 삼성에 올리는 사과문이라 봐도 무리가 없다.

 

초일류기업을 넘겨받을 후계자의 '쿨한' 사과문과 회사에 누를 끼칠까 걱정하는 임원의 '격한' 경위서가 비교되는 대목이다. 삼성을 바라보는 많은 눈들은 길면서도 절절한 사과문을, 간결하고 명쾌한 경위서를 기대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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