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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가리고 세금 털기?..개혁은 어디 가고

  • 2013.08.08(목) 16:20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권이 바뀌면 조세 제도부터 손을 댄다. 전 정권과의 차별화를 꾀하면서 세금을 깎아 국민들의 마음을 얻거나, 국책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세금을 쥐어짜내기도 한다.

 

최근 10년을 되돌아봐도 정권 초기 세금 제도의 변화는 두드러졌다. 노무현 정부는 상속증여세 포괄주의를 도입하며 재벌의 편법 대물림을 다잡으려 했고, 금융위기 직전 경기 호조로 세수가 남아돌던 이명박 정부는 소득세와 법인세 부담을 거침없이 낮추며 '감세(減稅)' 열풍을 몰고 왔다.

 

지난 2월 출범한 박근혜 정부는 경기 부진 속에 사상 최악의 세수 여건을 이어 받았다. 공약으로 내건 각종 복지 정책을 실현하려면 135조원이 필요하다. 새 정부에게 조세개혁과 증세(增稅)는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기획재정부가 8일 내놓은 세법개정안은 개혁과 증세가 고스란히 담겼지만, 세부 내용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새 정부다운 신선한 조세개혁은 없었고, 중장기 조세정책방향은 '적정화, 정상화, 효율화'라는 애매한 방향성만 제시했다.

 

소득·소비과세 비중을 높이는 대신 법인·재산과세는 성장 친화적으로 조정하고, 상속·증여세도 합리화하겠다고 뭉뚱그렸다. 결국엔 세금을 올리거나 내린다는 의미일텐데 여론을 의식해서인지 직설적 표현은 자제했다. 대신 세율 인상이나 세목신설 등 '직접적 증세'는 않겠다고 단언했다.

 

직접적 증세는 없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내년부터 바뀌게 될 세법개정안에는 '간접적 증세'가 한가득이다. 주로 근로자와 자영업자의 호주머니에서 세금을 더 걷어가는 대신, 중소기업에 대한 세금은 깎아줬다. 기업들이 적용받던 비과세·감면 제도는 축소 또는 폐지시켰다. 그만큼 세금을 더 내야 한다.

 

경기 침체로 근로자나 자영업자, 중소기업과 일반기업 모두 살림이 팍팍한데, 누구는 세금을 더 내라고 하고 한쪽에선 세부담을 덜어주는 모양새다. 어떤 이유로 세금을 올렸고, 깎아줬는지 합리적인 설명이 부족하고 일관성도 없다.

 

직장인 연말정산의 소득공제 방식을 세액공제로 바꾼 것은 제도의 정상화라기보단 세금을 더 걷기 위한 방편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가뜩이나 복잡한 연말정산 공제 항목이 확 바뀌면서 2015년 초 새로운 신고서를 작성하는 직장인들은 큰 혼란을 겪을 전망이다.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결국 세금은 더 내야 한다. 연말정산 제도가 바뀌면 연봉 3500만원을 넘는 직장인은 대부분 세부담이 늘어난다.

 

반면 자녀에게 물려주는 재산에 대한 증여공제 한도를 20년만에 높이는 등 증여에 대한 세부담은 낮췄다. 직장인들이 늘어난 원천징수 세금과 복잡한 연말정산과 씨름할 때, 고액 재산가들이 자녀에게 재산을 물려줄 때 내는 세금은 가벼워진다. 월급쟁이들 입이 튀어나오는 이유다.

 

어렵사리 포함된 종교인 과세도 시늉만 냈다. 종교계인들이 '근로'에 대한 거부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사례금에 대한 기타소득으로 과세하고, 준비할 시간을 주기 위해 2015년으로 시행 시기를 늦췄다.

 

기타소득에는 80%의 필요경비를 제외하기 때문에 일반 근로자들이 내는 세금보다 훨씬 적다. 종교인의 실제 소득세율은 4% 수준으로 근로자의 최저 세율(6%)보다도 낮다. 45년만에 과세의 첫 발을 내딛은 것은 의미가 있지만, 조세형평성을 논하기엔 낯간지러운 수준이다.

 

새 정부 첫 해에 강하게 밀어나갈 과제들은 중장기로 미뤄놓고, 당장 추진할 세법개정안들은 한결같이 설익은 모습이다. 증세의 물결 속에 일부 감세가 뒤엉키면서 형평성도 맞추지 못했다. 정부가 세법개정안의 비전으로 밝힌 '공평하고 원칙있는 세제'는 온데간데 없고, 국정과제를 적극 지원하거나 창조경제 기반을 구축한다는 구호만 늘어놨다.

 

세금을 더 걷어야 한다면 국민적 합의를 이끌어 낼 명분이 필요한데, 정부 스스로 일관성을 잃으면서 불만과 저항만 키우는 게 아닌지 우려스럽다. 뚜렷한 개혁 의지나 설득력 없이 세부담만 늘린 개정안이 국회를 온전히 통과할 지도 의문이다. 야당은 벌써부터 박근혜 정부의 첫 해 세제개편안을 '월급쟁이 세금폭탄'으로 규정하고 칼날을 벼르고 있다.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해 시행되면 국민과 기업은 결국 2조5000억원의 세금을 더 내야 한다. 금융위기 이후 증세 기조가 5년째 지속되면서 세금에 대한 국민들의 피로도는 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눈가리고 호주머니를 털어가는 걸 좋아할 사람은 없다. 간접적 증세도 결국 국민과 기업의 소득 일부를 국가가 강제로 걷어가는 행위임에 분명하다. 그러려면 과세의 목적과 수단이 합리적이고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어려워지고 있는 국민과 기업 형편을 감안한다면 최소한의 성의라도 보여야 한다. 정부의 책무이자 도리다. 새 정부의 세법개정안이 과연 국민들에게 손벌릴 자격이 있는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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