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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중의 눈물에 담긴 의미

  • 2014.08.27(수) 16:42

오후 7시 7분 그가 걸어들어왔다. 한 눈에 보기에도 고령임을 느낄 수 있는 걸음걸이다. 수행원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걸음을 뗐다. 취재진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자 잠시 멈춰섰다. 당황한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예상했다는 표정이었다.
 
수년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은 그렇게 등장했다. 단정하게 옷을 차려입었지만 얼굴과 걸음걸이에 묻어있는 세월의 흔적은 지울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뗀 그는 행사장으로 천천히 걸어들어갔다.
 
취재진들이 곁에 붙어 질문을 던졌지만 묵묵무답이었다. 그가 장내에 들어서자 사회자가 외쳤다. "지금 회장님이 들어오십니다" 장내에 있던 수많은 대우인들은 모두 기립했다. 환호와 함께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김 전 회장은 감개무량한 듯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단상을 향해 걸어나갔다. 그가 단상에 올라서자 장내는 숙연해졌다. 그는 미리 준비한 원고를 읽어나가기 시작했다. 그의 목소리는 살짝 떨렸다. 하지만 힘이 있었다.
 
중간중간 발음이 명확치 않았다. 역시 세월 탓인 듯 했다. 그는 "억울함도 있고, 비통함도, 분노도 없지 않았지만 과거이기 때문에 감수하려 했다"며 "하지만 이제 시간이 충분히 지났으니 적어도 잘못된 사실은 바로 잡혀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김 전 회장은 "나는 평생동안 앞만보고 성실하게 달려왔다"며 "그것이 국가와 미래세대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뿐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국가와 미래' 부분부터 그의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했다.
 

목이 메는 듯 했지만 계속 원고를 읽어 내려갔다. 청중들의 시선은 그를 향했다.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감정이 북받쳐 오르는 듯 했다. 청중들 중에서도 눈물을 훔치는 사람이 여럿 보였다.  
 
그는 "우리는 역사가 주는 교훈을 통해 조금이라도 과거보다 나아진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과거의 잘못된 실수가 미래에 반복되서는 안된다"고 덧붙였다.
 
한때 국내 재계 서열 2위의 대우그룹 수장이었던 그다. 내수에 치중하던 당시 일찍 글로벌화에 눈을 돌려 세계 시장 개척에 나섰던 글로벌 경영 선도자였다. 미수교국에 진출해 국교를 맺는 것을 돕기도 했다. 그와 대우의 흔적은 여전히 세계 곳곳에 남아있다.
 

이날 특별강연을 했던 신장섭 싱가포르 국립대 교수는 시종일관 대우그룹의 해체는 잘못된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했다. 그리고 김우중 회장과 대우그룹은 재평가 받아야한다고 역설했다.
 
김 전 회장도 자신의 입을 통해 대우그룹의 해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보다 신 교수를 통해 진실을 알리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했다. 신 교수는 최근 '아직도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는 책을 펴냈다.
 
김 전 회장과 이틀에 걸쳐 15시간을 대화했던 내용을 책에 고스란히 담았다. 책에는 대우그룹의 해체는 정권에 의한 기획 해체였다는 주장이 담겨있다. 신 교수가 집필했지만 사실상 김 전 회장의 회고록과 마찬가지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전직 대우그룹 출신 임직원들은 모두들 김 전 회장의 말을 경청했다. 그들은 김 전 회장의 연설을 들으며 15년전 대우그룹 해체 시절을 떠올리는 듯 했다. 과거 자신들을 이끌던 김 전 회장의 등장에 그토록 감격해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전 대우그룹 계열사 임원은 "회장님 말씀을 듣고 있는 내내 마음이 아팠다. 얼마나 하고 싶은 말씀이 많겠나. 하지만 다 하지 못하신다. 오늘 얼굴을 뵌 것만으로도 흡족하다"고 했다.  
 
김 전 회장은 "저는 미래를 담보할 수 없는 나이가 돼 있다"며 "남은 인생동안 마지막 봉사라고 여기고 젊은이들이 해외로 뻗어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려 한다"고 밝혔다. 
 
또 "우리가 키우는 젊은이들은 대우의 정신을 계승할 후배들이라 생각하고 많이 성원 바란다"고 덧붙였다. 원고를 모두 읽은 그가 단상에서 내려섰다. 취재진들이 몰려들었다. 김 전 회장은 단상 옆 문을 통해 주차장으로 빠져나갔다.
 
취재진들이 구름같이 몰려 김 전 회장을 붙잡았다. 한 마디라도 김 전 회장이 해주기를 바랐다. 취재진과 수행원들 틈바구니에서 김 전 회장에게 추징금 문제를 물었다. 김 전 회장은 잘 알아듣지 못한듯 했다. 취재진이 재차 묻자 그는 가던 길을 멈춰섰다.
 

난감한 표정을 짓던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인채 작은 목소리로 "나중에 이야기 하자"고 했다. 어렵사리 차에 오른 그는 아무말 없이 뒷좌석에 앉았다. 취재진들이 문을 두드리며 "회장님, 한말씀만 해주시죠"라고 외쳤지만 그는 묵묵히 앞만 바라봤다.
 
자신의 입이 아닌 타인의 입을 빌려 억울함을 호소할 수 밖에 없었던 김 전 회장. 비록 타인의 입을 빌렸지만 그는 이제라도 15년 전의 일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는 사실에 감개무량한 듯 보였다.
 
김 전 회장에게 대우그룹 해체의 진실을 밝히는 일은 이제 남은 생의 사명이 됐다. 차에 올라 묵묵히 앞만보고 있던 그의 눈가에는 여전히 눈물이 남아있었다. 그 눈물에는 지난 15년간 그가 겪었을 고초와 회한이 담겨있는 듯 했다.
 
마침 행사장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한참을 출발하지 못하던 그의 차는 취재진이 물러나자 그제서야 조용히 밖으로 빠져나갔다. 빗속(雨中)으로 김우중 전 회장은 그렇게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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