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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기 경제팀]① '진보' 정권의 역선택..결과는

  • 2013.08.16(금) 11:54

경제부총리로 김진표 파격 발탁
첫 작품 '법인세 인하'..친재벌 성향에 大怒

노무현-김진표, 이명박-강만수, 그리고 박근혜-현오석. 이 조합의 공통점은? 대통령과 그 정권의 초대 경제사령탑 커플이다. 물론 정부의 공식 2인자인 국무총리가 있지만 우리네 살림살이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경제에서 만큼은 경제부총리(이명박 정권에서는 기획재정부 장관)의 권한과 역할이 막중하다.

 

매번 대선이 끝난 후 정치인 대통령을 보좌하는 '경제 부통령'이 누가 될 지 매번 초미의 관심사였다. 선거에서 대통령이 "앞으로 5년 간 대한민국 경제를 이렇게 살리겠다, 이끌겠다"는 큰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 정권 1기 경제팀장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여정부와 이명박 정부 1기 경제팀의 시작과 끝, 공과를 살펴보고, 세법개정안으로 풍전등화 운명에 처한 현 정권 1기 경제팀의 미래를 예측해본다. 시진핑(習近平)과 리커창(李克强), 중국 커플은 보너스다.[편집자]


김진표 전 경제부총리(현 민주당 3선 의원·수원 영통)는 2003년 2월 27일 부터 2004년 2월 10일까지 만 1년에서 보름을 뺀 기간 동안 대한민국 제 12대 경제부총리, 참여정부 초대 경제사령탑을 지냈다.

 

31년 간의 공직생활 기간 대부분을 '모피아'로 불리는 재무부에서 지낸 정통 관료 출신이다. 1973년 행시 13회, 27세에 국세청에서 공직을 시작해 이후 재경부 세제심의관, 세제실장, 차관 등을 거친 세제전문가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캠페인에서 구조조정 지속, 재벌 개혁을 부르짖었다.  전임 DJ 정부보다 더 진보적인 정권 5년을 예상하며 재계와 대기업은 바짝 긴장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런 상황에서 재계에 '큰 걱정말라'는 시그널을 보내야했다. 

 

 

◇ "재계여, 불안해하지 말라"

노무현 전 대통령은 당선자 신분일 때부터 재계의 불안을 의식했다. 2002년 12월 대선 직후부터 재계는 진보 진영의 재벌개혁론자들이 다수인 인수위 경제분과 위원들이 재벌개혁과 분배에 초점을 맞출 거라고 우려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런 재계를 향해 "규제완화를 통해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조성하겠다"고 다독였다. 경제 5단체장과 만나 재계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다. 김진표 인수위 부위원장은 역시 "시장경제 질서 확립과 대외신뢰도 제고를 경제운용의 가장 큰 방향으로 삼겠다"고 거들었다.

 

1기 내각에서 노 전 대통령은 고건 총리-김진표 부총리 카드로 '노무현 정부는 급진적일 것'이라는 보수진영과 재벌, 대기업들의 불안을 달랬다. 이광재 전 국정상황실장은 "노 대통령은 (보수적인) 김진표 경제부총리와 진보적인 이정우 청와대 정책실장을 (경제팀에) 같이 쓰는 등 색깔 다른 이들을 기용했다"고 말했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2주기인 2011년 5월 23일 민주당 영등포 당사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당시 손학규 대표(오른쪽)와 김진표 원내대표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 "가장 일 잘하는 공무원"


김대중 정부 시절인 2001년 2월 당시 노무현 해양수산부 장관은 2년 가까이 차관으로 재직했던 홍승용 차관의 후임을 물색 중이었다.  생전 처음으로 관료 사회를 경험하던 노 전 대통령은 딱 2명을 차관 후보로 생각했다.

 

'정말 일 잘하는, 능력있는 관료'를 새 차관으로 데려와 해수부에서 큰 성과를 내고 싶어했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김진표 재정경제부 세제실장과 박봉흠 기획예산처 예산실장을 '찍었다'고 했다. 

 

하지만 스카우트에 실패했고,  노 장관은 대권을 쟁취하자마자 두 사람을 바로 내각으로 불러 들였다. 각각 경제부총리와 기획예산처 장관으로 말이다. 정권 초반 '경제는 좌 진표, 우 봉흠'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신임이 두터웠다.


사실 당시 경제부총리에는 김종인 전 청와대 경제수석과 장승우 전 기획예산처 장관, 민주당 강봉균 의원 등이 물망에 올랐고, 김진표는 경제 부처 장관 후보로 오르내렸다. 행시 13회, 50대 중반의 나이는 경제부총리의 '격'에 맞지 않는다는 게 관가의 예측이었다.


◇ 기수 파괴…컨트롤 난항


노무현 전 대통령은 첫 내각 인사를 발표하면서 "부처 내 서열주의를 파괴하기 위해 과감한 인사를 단행했다"고 강조했다.

김 전 부총리는 행정고시 13회로 전임 전윤철 전 부총리보다 무려 9기수나 차이가 났다.  경제부처 장관 가운데 '경제팀장'인 김 부총리보다 고시 후배는 없었다.

 

인사와 업무에서 고시 서열을 중시하는 공무원 사회에서 전례를 찾기 힘든 상황이었다. 상대적으로 젊은 경제수장으로서 '카리스마'를 인정받기 힘들었고, SK글로벌 사태, 담뱃값 인상 등 경제부처 간 이해가 엇갈리는 문제를 조율하는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경제 전체가 아니라 자신이 가장 잘 아는 세제로만 문제를 풀려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청와대 내부에서도 "경제가 엉망인데 이 눈치 저 눈치 보느라 누구도 총대를 매려 하지 않고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김 전 부총리의 리더십 부재를 심각하게 여겼다.

 

 그는 "부총리로서 리더십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많이 듣고 있지만 그 부분은 인위적으로 노력해서 되는 부분이 아니다"라며 스스로 부족함을 인정하기도 했다.


◇ '법인세 인하' 갈팡질팡…불협화음


김진표 경제팀의 첫 작품은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한 법인세 인하 조치였다. 경기를 살리는 해법으로 세금을 내리고 투자를 활성화하는 쪽으로 잡았다.

 

노무현을 찍은 쪽에서는 난리가 났다. 친재벌 편향의 정책을 통해 재벌개혁을 포기하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청와대 내 386측근들 역시 심각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도 "법인세율이 선진국은 물론 중국 일본 등에 비해 높지 않고 인하 혜택이 대기업에 만 돌아간다"며 반대했다.

 

김 전 총리는 부동산대책에서 민간도 아닌 주택공사의 분양원가를 공개해달라는 요구를 '사회주의적 조치'라며 언급해 논란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가구 1주택에 대한 양도소득세를 부과할 필요가 있다는 발언도 바로 취소했다. 또 '미국의 영변 핵시설 폭격 발언' 논란도 구설수에 올랐다. 태풍 '매미'가 전국을 강타했을 때 제주도에서 휴가 골프를 쳐 여론의 비난을 받기도 했다.

 

경제팀 내부의 불협화음도 간단치 않았다. "재정적자를 감수하더라도 경기활성화에 나서야 한다"는 김부총리의 구상에 대해 경제팀 투톱의 한 축인 박봉흠 기획예산처 장관은 "참여정부 초기부터 재정적자는 곤란하다"고 정면 반박했다. 강철규 당시 공정거래위원장은 국무회의 석상에서 김부총리가 마련한 가계부채 통계의 '부실'을 공개 거론하기도 했다.

 

◇ 능력과 성향, 둘 다 문제

 

하지만 정작 노 전 대통령이 가장 신뢰하는 관료인 김 전 부총리에게 대노(大怒)한 이유는 그의 친재벌 성향 때문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2003년 3월 국무회의 석상에서 참석자들이 바짝 긴장할 만큼 김 전 부총리를 질타했다. 김 부총리의 '가계대출 현황과 대응방안'보고에 대해 "대책없이 대강 짚고 넘어가자는 거냐"라며 '대책없는 대책'이라고 일갈하자 회의장이 일순 얼어붙었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이 대노한 이면에는 당시 김 전 부총리가 검찰에 SK수사 발표 연기를 요청했다는 보고가 크게 작용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정권 초반 "경제는 경제부총리에게 맡기고 나는 동북아등 국정과제와 에너지 등 미래문제만 챙기겠다"고 말했던 노 전 대통령은 이날 경제문제를 직접 챙기겠다는 의사표시까지 분명히 했다.

 

능력과 성향 모두에서 노 전 대통령이 김 전 부총리를 못믿겠다고 질타한 셈이다.  김 부총리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건 이 때가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김 전 부총리는 수도권규제완화, 법인세인하, 가계부채대책 등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정책마다 공개적으로 '훈계'를 받고 있으며 청와대 홍보 매체인 '청와대 브리핑'에도 '질책'이란 용어를 써가며 김 전 부총리를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특히 당시 청와대 진보성향 관계자들은 일제히 세제 전문가인 김부총리의 '개혁성'이 부족하다며 조세정의를 생각하라고 펀치를 날리기도 했다.


◇ 7중고에서 출발…총선 차출


참여정부 경제팀 수장으로 그는 첫 출발부터 삐그덕거렸다. 우선 대내외 경제여건이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북핵 문제 ▲이라크 전쟁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SK글로벌 쇼크 ▲신용카드 대란 ▲신용불량자 ▲대형 노사분규 문제가 악재로 작용했다.

 

2003년 1년 내내 우리 경제는 극심한 '내우외환'에 시달리며 살얼음판을 걸었던 시기였다. 2002년 6.3% 성장은 2003년엔 절반 수준으로 떨어졌다. 한국에 A학점을 줬던 신용평가사들도 평가를 낮추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이런 상황에서 인위적인 경기부양책을 쓰지 않았던 점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눈앞의 숫자에 급급해 인위적 경기부양책을 쓰고 싶은 유혹도 있었다. 하지만 이 보다는 재정조기집행과 2차례의 추가경정예산 편성, 근로소득세·법인세·특별소비세 감면과 같은 감세정책 등 정부의 경기조절 수단을 적절히 사용했다는 평가다. 금융시장의 최대 난제였던 조흥은행 매각을 성사시킨 점도 긍정적인 부분으로 꼽힌다.

 

경제부총리로서의 공과와는 별도로 김진표 전 부총리는 고향인 수원을 기반으로 정치인 데뷔를 꿈꿔왔다.  공직 생활 중에도 항상 수원을 신경썼다. 기자들과 만날 때도 경복고 출신임을 은근히 내세웠지만 수원중학교를 나온 수원 토박이라는 것을 꼭 강조했다.

 

결국 '울고 싶은 데 빰 맞은 격'처럼 김 전 부총리는 17대 국회의원 선거, 총선을 불과 2개월 앞두고 열린우리당 후보로 '차출'된다.

 

당시 새로 생긴 지역구인 수원 영통에서 당선되며 정치인으로서의 제2인생을 시작했다. 노 전 대통령의 신임을 다시 받아 교육부총리로 재발탁됐던 그는 현재 같은 지역에서 3선을 기록 중이며 민주당 원내대표를 거쳐 내년 지방선거에서는 경기도지사에 도전할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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