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기 경제팀]② '리-만 브러더스'의 공과

  • 2013.08.19(월) 11:21

'킹만수' '강고집' 초대 경제사령탑

노무현 정부의 김진표 초대 경제부총리와 현 박근혜 정권의 현오석 초대 경제부총리와 달리 전임 이명박 정부에서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며 부총리 제도를 아예 없앴다. 하지만 경제부총리 보다 더욱 더 강력했던 MB정부 초대 경제사령탑 강만수. 그는 기획예산처와 재정경제부가 합쳐진 첫번째 기획재정부 장관이었다.

 

1997년 IMF 위기 당시 재정경제원 차관을 지낸 강 전 장관은 1998년 국민의 정부 출범과 함께 관가를 떠났다. 정확히 10년 뒤 2008년 화려하게 복귀한 그는 'MB노믹스'의 설계자로서 MB 임기 5년 간 최측근 경제실세였다.  강 전 장관에 대해 그 평가는 "금융위기 극복의 1등 공신"에서 "서민경제 파탄의 주범"까지 극과 극을 달린다.

[MB정부 시절 이명박 대통령과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청와대 회의실에 나란히 들어서고 있다.]

 

◇ 소망교회, 서울시…'리만브라더스'

 

1945년 경남 합천 출생인 강 전 장관의 인생 성적표에는 '수석'이라는 레떼르가 많이 붙어있다. 경남고 수석 졸업 뒤 서울대 법학과에 입학, 행정고시 8회 재정직에 수석 합격했다.

 

세무서에서 공직을 시작했지만 재무부로 옮겨 세제국 사무관 시절이던 1977년 부가가치세 신설에 실무자로 일하기도 했다. 미국 대사관 근무, 유학에 이어 재무부로 돌아온 이후 그는 재무부 3대요직으로 불리는 이재국장, 국제금융국장, 세제실장을 모두 해본 유일한 관료로 기록돼 있다.

 

1997년 재정경제원 강만수 차관은 IMF 사태를 직접 경험한다. 김대중 정부 등장 이후 그는 실업자로 전락했지만, 이명박 서울시장이 무역협회 부회장이던 그를 다시 공직으로 부른다.

 

두 사람은 1981년 소망교회에서 처음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강 전 장관이 2000년대 들어 공천심사위원, 미래경쟁력위원 등으로 한나라당 안팎에서 활동한 것도 MB의 추천이 작용했다. 본격적인 파트너가 된 때는 2005년, 서울시장이던 MB가 강 전 장관을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원장으로 부른 것이다. 이 연구원이 주도한 청계천 복원, 대중교통 시스템 개편 등을 거치며 강 전 장관은 MB의 핵심 참모로 급부상했다.

 

그리고 3년 뒤, 강 전 장관은 재정경제부와 기획예산처가 통합된 기획재정부의 초대 장관으로 MB정부의 경제사령탑에 오른다. '리-만 브라더스'의 시작이었다.

 

◇ '747 공약'…고성장을 위한 감세·고환율 정책

 

이명박 후보는 2007년 대선에서 7%대 경제성장률, 국민소득 4만 달러, 세계 7대 경제대국을 달성하겠다는 '747 공약'을 내걸었다. '강고집' '킹만수'라는 별명에 걸맞게 그는 이 기조에 맞춰 성장, 감세, 고환율 정책을 밀어붙였다.

 

'환율주권론자'인 그는 정부가 환율을 인위적으로 조작해 성장동력으로 삼아야 한다는 데 초지일관했다. 강 전 장관은 "수출로 먹고 사는 우리나라의 경우 수출이 늘어나면 소득이 늘어나고, 이런 선순환이 시작되면 물가 인상도 감당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강 전 장관은 물가가 오르는 인플레이션 상태에서 고환율정책을 추진해 기업들의 수출이 늘어나기도 전에 물가 상승을 부추긴다는 공격을 받았다.

 

또 기업의 경쟁력이 회복되면서 경제가 선순환에 진입하기도 전에 글로벌 금융위기가 닥쳤다. 뿐만 아니라 국제 유가 등 원자재 가격이 상승해 물가 상승이 계속돼 수입품의 가격이 높아지는 고환율 정책은 효과를 볼 수 없었다.

 

취임 몇 달도 안돼 야당은 물론 여당인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경질론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고환율정책에서 생각이 같았던 MB는 최중경 당시 차관을 강 전 장관 대신 경질해 '대리경질' 논란이 일기도 했다.

 

강 전 장관 정책의 또 다른 축인 대기업 감세 역시 '성장'이 해결책이라는 생각에서 시작됐다. 기업의 세금 부담을 덜어줘야 성장을 통한 복지가 가능하다는 논리다.  그는 "법인세 인하로 6개월에서 1년 사이에는 기업 투자가 늘어날 것"이라고 장담했다. 하지만 성장의 혜택이 곳곳에 퍼진다는 '낙수효과'는 없었고, '부자 감세'라는 여론의 비판만 커졌다.

 

결국 2008년 정권 출범 후 불과 1년도 채 안되 터진 금융위기 탓에 747 공약은 유야무야됐다. 강 전 장관은 747공약을 스스로 폐기했다. "747공약은 캐치프레이즈로 내건 것이지 그 공약을 구체적으로 달성하는 건 무리가 있다" "금융위기 극복을 위해 747 공약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말할 정도였다.

 

[2007년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국회에 출석해 답변하고 있다.]



◇ 금융위기 정면 돌파 vs. 파탄 주범

 

강 전 장관이 2008년 말 터진 금융위기를 한미통화 스와프 체결 등으로 잘 넘겼다는 평가는 분명하다. 당시 '긴급 G20 재무장관.중앙은행 총재회의'에서 한국과 같은 신흥국들도 금융위기에 따른 정책공조에 포함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고, 이런 노력은 300억 달러 규모의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로 이어져 환율시장 안정에 큰 도움이 됐다.

 

이는 강 전 장관이 97년 겪었던 IMF 위기 상황에 대한 기억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 스스로 "금융위기를 맞아 IMF 위기 경험을 바탕으로 선제적이고, 확실하며, 충분한 대책을 추진했다"면서 "금리 인하, 통화스와프 체결, 감세, 재정지출 확대 등에 힘입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빨리 위기를 극복했다"고 자평했다.

 

하지만 그의 정책으로 양극화 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내수가 위축됐다. 한마디로 서민경제가 위기에 처했다. 강 전 장관 본인도 "반성해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참여정부 1기 경제팀 수장인 김진표 전 총리가 1년여 만에 교체된 것처럼 강 전 장관도 1년 뒤인 2009년 경질된다. 하지만 강 장관의 교체는 문책은 아니었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청와대 경제특보로 MB곁으로 복귀했다. 2011년 3월 그는 산은금융지주 회장 겸 산업은행장이 됐고, 어윤대 KB금융지주 회장 등과 함께 금융계의 MB실세, '4대 천왕'으로 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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