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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연기금 사회주의'란 유령

  • 2018.06.03(일) 14:29

국민연금 오욕의 역사쓰던 때 글로벌 투자트렌드는 이미 변화
주주권 발 묶어두는 낡고 오래된 담론이 한진 갑질 키운 공범

 

지금은 당연한 듯 받아들이는 연기금과 기관투자자의 주주권 행사는 사실 역사가 오래되지 않았다.

1980년대 이전까지 전통적으로 주요 금융선진국의 기관투자자들은 소위 월스트리트룰(Wall Street Rule)을 따랐다. 투자기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의결권 행사 대신 해당 주식을 파는 방법으로 의사표시를 하는 것이 월스트리트룰이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얘기처럼 말이다.

기관투자자의 목소리가 중요해진 것은 1980년대 미국 월가가 적대적 인수합병(M&A) 시대를 맞이하면서다. M&A는 누군가가 가진 기업의 주식을 대량으로 사고파는 행위다. 따라서 기관투자자가 가진 주식이 중요한 거래대상이 되면서 이들의 목소리가 이전과 달라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1998년 이전까지 기관투자자의 의결권 행사를 아예 법적으로 금지했다. 외환위기를 거치면서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해선 기관투자자가 기업경영의 감시자가 되어야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비로소 의결권 행사를 허용한 것이다.

당시 기관투자자 의결권을 허용하기 위해 바꾼 법은 지금의 자산운용사에 해당하는 투신사(투자신탁회사)에 적용하던 증권투자신탁업법이다. 공적연기금인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를 허용한 것은 그로부터 몇 년 더 지난 뒤에 나타난다.  2005년 참여정부는 공적연기금도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하는 내용의 기금관리기본법 개정을 추진했다.

야당 대표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당시 한나라당 대표)은 이러한 법 개정 움직임에 "연기금 사회주의로 나아가려는 것"이라며 반대했다.


법은 통과됐다. 야당이 반대하던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처리하지 않는 조건으로 기금관리기본법(현 국가재정법)을 통과시킨 것이다. 정치권에서 흔히 대타협이란 명목으로 빈번하게 발생하는 '법안 주고받기'였다. 그렇게 물꼬를 튼 국민연금 의결권이 훗날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과 구속에 중요한 단서가 된 사실은 역사가 주는 역설이다.

아무튼 국민연금은 법이 바뀌면서 2005년 12월부터 비로소 의결권행사지침과 세부기준을 마련해 체계적인 의결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도 내성적인 성격이 한 번에 확 바뀌지 않듯 국민연금은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주총 안건에 단순 찬성·반대 의사를 표명하는 의결권 행사에 그쳤다.

2006년 국민연금의 의결권 행사 내역을 보면 찬성 95.6% 반대 3.7%로 찬성이 압도적이었다. 거수기였다. 강산이 한번 바뀐 10년 뒤 2015년에는 찬성 89.4%, 반대 10.1%로 성격 변화가 나타났지만 온전히 탈바꿈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수준이었다.


물론 반대율 2% 내외의 민간 기관투자자와 비교하면 국민연금은 그나마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해왔다고 자평하기도 했지만 의사결정 절차의 독립성, 정치권의 영향력, 배당 위주의 소극적 의사표시 등 다방면에서 문제점을 노출했다.

문제점은 2015년 한방에 크게 터졌다. 국민연금에게 잊지 못할 해이다.

그해 1월 국민연금법 102조에 '안정적인 수익 증대를 위해 투자대상과 관련한 환경·사회·지배구조 등의 요소를 고려할 수 있다'는 이른바 책임투자 조항이 들어가면서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는가 싶더니 6개월 후 국민연금 기금운용 역사상 최대 오점을 남긴다.

2015년 7월 삼성물산-제일모직 합병 주주총회에서 의결권 자문기관의 반대 권고에도 찬성표를 던진 것이다. 특히 당시 삼성물산의 최대주주(지분율 11.2%)였던 국민연금이 의결권 찬반 여부를 자체 투자위원회 단독 결의로 처리하는 돌발행동을 하면서 스스로 원칙과 투명성을 훼손했고, 이는 당시 의사결정 책임자이던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장관, 홍완선 전 기금운용본부장에 대한 법원(1·2심)의 실형 선고로 이어졌다.

국민연금이 오욕의 역사를 남기던 그 시기 글로벌 연기금의 투자트렌드는 이미 바뀌고 있었다.

영국은 글로벌금융위기의 문제점을 분석한 '워커보고서'를 토대로 2010년 처음으로 기관투자자의 수탁자 책임을 담은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했다. 이웃나라 일본도 2014년 세계최대 연기금인 자국의 공적연금(GPIF)을 앞세워 스튜어드십코드를 받아들였다. 일본이 스튜어드십코드를 도입하면서 내세운 명분과 목표는 ‘일본이 다시 일어선다(日本再興)’는 것이었다. 연기금과 기관투자자가 수탁자 책임을 다함으로써 기업가치 향상에 일조하고 이를 통해 시장경제 더 나아가 일본경제를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것이었다.

국민연금이 남들이 좋다는 해외부동산을 찾고 있을 때 노르웨이 국부펀드(NBIM), 캐나다연금투자위원회(CPPIB) 등 자산운용규모에서 국민연금과 어깨를 견주는 해외 주요연기금도 책임투자원칙에 따라 투자회사와의 적극적인 미팅, 투자배제 리스트 작성·공개, 이사후보 추천 등 덩치에 걸맞은 다양한 형태의 주주활동을 수행하며 전 세계 투자흐름의 물줄기를 바꾸고 있었다.

국민연금이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 일가의 '갑질사건'에 대응해 사상 처음으로 의결권행사를 넘어선 공개적인 주주권 행사에 나선 것을 두고 ‘그 다음에는 무엇을 할 거냐’는 식의 논쟁이 나타나고 있지만 큰 물줄기는 이미 방향을 잡아서 걸어가고 있다.

43년 전 미국의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가 처음 꺼내든 ‘연기금 사회주의’는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와 관련한 논쟁이 있을 때마다 등장한 유령 같은 존재지만, 지금 우리 사회가 고민해야할 지점은 낡고 추상적인 담론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이다.

국민연금이 적용받는 국가재정법 64조는 '기금관리주체는 기금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의 의결권을 기금의 이익을 위해 신의에 따라 성실하게 행사하고 그 행사 내용을 공시해야한다'고 규정한다.

이러한 법 조항이 있는 이유는 국민연금의 돈이 연금의 것이 아니며 수많은 국민들이 노후를 위해 현재 얻은 수입에서 일정액을 의무 납부하고 있는 것임을 한시라도 잊지 말고 수탁자로서의 책임을 다하라는 의미다.

다수의 개인·일반투자자의 자금 운용을 대리하는 연기금·기관투자자들은 그 지위가 갖는 무게감이 개인이나 일반투자자와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연기금과 기관투자자로 하여금 주주권은 고사하고 의결권조차 적극 행사하지 못하도록 해온 우리사회의 낡고 오래된 유령이 고개를 든다. 그 유령은 단지 핏줄이 같다는 이유로 물려받은 힘을 가지고 아무에게나 고함을 지르고 갑질을 일삼은 한진그룹 총수일가 같은 ‘견제받지 않는 권력’을 키운 공범이다.

기업과 사회의 지속가능한 성장에 기여할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꾸준히 대화하고 변화를 요구하며, 자신들이 가진 권한을 적극 검토함으로써 수탁자로서의 역할을 다해야하는 것은 바꿀 수 없는 변화의 물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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