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하, 듣기 싫은 얘기일 수 있겠습니다만, 우리가 방문한 영국·독일 등이 부국인 이유는 은퇴자들이 노후에 빈곤을 걱정하지 않고 안정된 삶을 살고 있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우리 경제도 많이 성장하였으므로 국민연금제도를 정비해 노후를 빈곤 걱정하지 않고 살게 해줘야할 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유럽 4개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하던 1986년 4월21일. 비행기가 알프스 상공을 지날 무렵 김만제 경제기획원 장관 겸 부총리와 사공일 대통령실 경제수석이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당시만 해도 국민연금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대세였다. 2년 전인 1984년 청와대 회의 때 국민연금 도입을 설명하는 참모들에게 '이런 것(연금도입) 하면 경제가 망한다"고 질책했던 사람도 다름 아닌 전 전 대통령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국민연금 도입에 반대만 해오던 그가 고집을 꺾고, 귀국 비행기 안에서 참모들에게 "검토해보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리고 4개월 뒤 1986년 8월11일 기자회견을 열고 국민연금 도입을 성대히 발표했다. 이후 속전속결로 국민연금법을 제정하고 국민연금관리공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1988년 1월 역사적인 국민연금 제도가 첫발을 뗐다. (<실록 국민의 연금>에서 발췌)
◇ 도입 땐 '꿈의 연금'…문제해결은 다음 정부로
도입 초기 국민연금은 '꿈의 연금'이었다. 매월 월급의 3%(이후 5년마다 3%포인트씩 올라 1998년부터는 9%로 고정)만 내면, 60세부터는 자신이 받던 평균 월급의 70%를 받는 제도였기 때문이다.
(3%는 가입자의 보험료율, 70%는 소득대체율을 지칭한다. 지금 내야할 돈(보험료율)과 나중에 받을 연금(소득대체율)은 국민연금 제도를 설명할 때 가장 중요한 용어이자, 이후 30년간 이어진 국민연금 논쟁에서도 핵심 쟁점이다. 이 부분은 [국민연금 개혁]②편에서 더 자세히 다룬다.)
국민연금을 도입하던 1980년 후반의 상황과 관련,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는 지난 13일 자신의 홈페이지에 "국민연금 제도의 출범 배경에 정권의 정통성 결여를 메우려는 의도가 다분히 깔려 있었을 것이고 그래서 나중 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그런 선심을 쓴 것"이라며 "이런 불행한 출발이 두고 두고 우리의 발목을 잡아온 셈"이라고 지적했다.
1986년 6월 국책연구기관 KDI는 '국민연금제도의 기본구상과 경제사회 파급효과'란 보고서를 통해 "2038년부터 기금수지 적자가 발생하고 2049년 기금이 고갈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보고서는 기금고갈 직전에 급격하게 제도를 바꾸기 어렵기 때문에 보험료율을 올리고 연금지급(소득대체율과 수급 연령)은 조정해야한다는 점도 빼놓지 않았다.
국민연금 도입 발표 두 달 전에 나온 국책연구기관의 보고서이자 당시 국민연금 도입안의 뼈대가 된 보고서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군사정권은 국민복지시대를 위한 큰 결단을 내린 것처럼 홍보하면서도, 이 상태로 가면 기금이 고갈될 수밖에 없고 고갈을 조금이라도 늦추기 위해선 돈을 더 내고 덜 받아야한다는 점은 숨겼다.
군사정권이 함부로 뿌린 씨앗을 가꿔야했던 역대 정부들은 때마다 연금 제도개혁을 둘러싼 사회적 갈등과 마주했고 논쟁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연금의 생명력을 연장하기 위해 지난 30년간 몇 차례에 걸쳐 수술이 나섰지만 근본적인 처방은 되지 못했다.
◇ 나중에 받을 돈만 손댄 '연금 개혁'
국민연금은 지금까지 '연금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두번의 큰 수술대에 올랐다. 수술 과정에서 일관된 흐름은 연금가입자가 당장 내야할 돈인 '보험료율'은 건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도입 초기 보험료율은 3%였고 지금은 3배 높은 9%이지만 제도를 바꾼 건 아니다. 1988년 군사정권은 국민연금법 본문에는 9%를 내야한다고 명시해 놓고 부칙에는 '제도 초기 부담을 감안해 1988년부터 1992년까지는 3%, 1993년부터 1997년까지는 6%만 내면된다'고 달아놓았다. 결국 1988년부터 지금까지는 30년간 국민연금법이 정한 공식 보험료율은 9% 그대로다.)
손을 댄 것은 나중에 받을 돈(소득대체율)과 받을 시기(연금수령시점)였다. 당장 저항을 불러올 수 있는 '보험료율 인상'은 건들지 않고 상대적으로 먼 미래의 일인 '적게 받고 늦게 받는 것'에 손을 댄 것이 그간의 국민연금 개혁이다.
국민연금이 처음 수술대에 오른 것은 제도 도입 10년째인 1998년이다. 소득대체율을 70%에서 60%로 한꺼번에 10%포인트 내렸다. 또 연금수령시점도 15년 후인 2013년을 시작으로 매 5년마다 1세씩 늘려서 2033년에 65세로 연장되도록 했다.
1998년 1차 연금개혁 때는 재정계산이라는 개념도 공식 도입했다. 사회경제적 변화로 인한 연금재정의 불균형을 막기 위해 매 5년마다 재정수지를 계산하고, 그 계산에 기초해 급여수준과 보험료율을 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다. 이에 따라 2003년 국민연금은 '2047년 기금이 고갈될 것'이라는 1차 재정계산 결과를 발표했다.
놀라운 점은 1차 재정계산 결과가 17년 전인 1986년. 국민연금 도입 직전 발표한 KDI 보고서의 예측치(2049년)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군사정권이 연금제도를 시작하기 전부터 기금 고갈은 예견됐고 이를 늦추기 위해선 돈을 더 내야하거나 덜 받아야한다는 점도 충분히 예측됐다는 것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국민연금은 도입 20년차인 2007년 또 한번 수술대에 올랐다. 이번에도 소득대체율이 타깃이었다. 60%에서 50%로 10%포인트를 즉시 인하하고, 이후 매년 0.5%포인트씩 추가로 낮춰 2028년에 40%까지 내리는 방안이었다.
소득대체율을 낮추면서 연금 고갈시점도 늦춰졌다. 이듬해 2008년 2차 재정계산에서 기금소진시기는 2060년으로 종전보다 13년 연장됐다. 줘야할 돈을 줄이니 고갈시점이 늦춰지는 건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당연한 결과였다.
2차 개혁 이후에도 국민연금을 둘러싼 크고 작은 논란은 지속됐고 여러가지 방안이 제시됐지만 가시적인 성과를 보인 내용은 없었다. 가장 최근 이뤄진 3차 재정계산(2013년) 결과도 기존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 10년마다 수술…이번엔 종합처방책 나올까
1988년 출발한 국민연금은 1998년 1차개혁, 2007년 2차개혁 등 공교롭게 10년마다 개혁이란 이름으로 큰 수술대에 올랐다. 그리고 다시 10년이 흘렀다.
이번에는 4차 재정계산을 통해 국민연금 고갈시기가 2057년으로 3년 앞당겨질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기금고갈시점을 늦추는 것은 쉽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나중에 줘야할 돈(소득대체율)을 줄이거나 연금 받을 시기(연금수령시점)를 늦추면 된다. 지금까지는 건들지 않았던 내야할 돈(보험료율)을 조금씩 올리겠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국민연금 개혁은 말처럼 간단한 산수 놀음이 아니다. 국민의 노후자산 문제를 언제까지 응급수술, 산소호흡기식 대처로 해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머리를 맞대야할 문제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1차·2차 연금개혁에서 연거푸 칼질을 했던 소득대체율은 명목상으로 현재 45%까지 내려왔다. 이마저도 가입기간 40년을 꽉 채워야하는 조건이다. 통상 20대 후반에 직장생활을 하는 이들이 40년의 연금 가입기간을 채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실제 가입기간을 고려한 실질소득대체율은 23.9% 수준이다. 국민연금을 '용돈연금'이라고 하는 이유는 실질소득대체율 때문이다.
연금 사각지대(퇴직후 연금수령시점까지 기다려야하는 시간)도 더 이상 모른 척해서는 안될 문제다. 지금 제도로는 온갖 난관을 뚫고 60세에 정년퇴직을 하더라도 연금을 받기까지 5년을 더 기다려야한다. 공무원연금·군인연금과의 형평성 문제는 종합 처방이 가장 필요한 지점이다.
4차 재정계산은 시작일 뿐, 그 결과를 바탕으로 연금 제도를 개선해야하는 것은 앞으로 최소 수개월간 정치권은 물론 우리 사회 전체가 머리를 맞대야할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