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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천장을 깨라"…여성임원할당제의 방향

  • 2018.08.24(금) 14:41

한국, OECD는 물론 아시아에서도 여성임원 꼴찌
이사회 구성 다양화, 경영효율성 차원에서도 필요

2004년 연말 업무보고를 받고난 그룹 부회장이 임원들에게 제안했다.

 

"글로벌시장에서 잘 나가는 기업들을 보면 이사회 등 각 분야에 여성이 많아요. 내년부터 우리 그룹도 여성임원 한번 만들어봅시다."

 

부회장의 제안에 머뭇거리던 임원이 이렇게 답했다.

 

"새로운 임원은 부장급에서 승진시켜야할텐데요. 그런데 저희 계열사 부장들 중에 아직 여성이 한명도 없습니다."

 

 

14년 전 여성 직원 가운데  최고위직급이 '차장'이었던, 그래서 임원후보조차 없었던 그룹은 롯데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신입 공채의 40%가 여성이며, 간부직(과장급 이상) 중 여성비율은 약 14%에 달한다. 2012년에는 내부승진을 통한 여성임원을 배출하고, 올해는 첫 여성 CEO도 나왔다. 사원부터 임원, CEO까지 단계적으로 여성비율이 증가하고 있다. 

 

당시 그룹 컨트롤타워인 정책본부 수장을 맡았던 신동빈 회장이 지금까지 10년 넘도록 여성인재를 적극 배출하겠다고 강조해왔고, 이를 뒷받침할 시스템도 꾸준히 만들어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롯데의 사례는 아직 예외적인 사례일뿐이다.

 

◇ 유리천장 가장 공고한 한국 

 

눈에 보이진 않지만 깨트리기 어려운 장벽을 뜻하는 유리천장(Glass ceiling). 이 단어는 여성이나 소수자들의 사회 고위직 진출을 막는 보이지 않는 장애물을 뜻하는 표현이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매년 여성의날(3월8일)을 맞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주요회원국을 대상으로 성별 간부직 비율과 임금격차, 교육·경제활동 참여율 등을 종합 평가한 유리천장지수(The glass-ceiling index)를 발표한다. 2013년부터 올해까지 6회 연속 이 지수의 꼴찌를 차지하고 있는 나라가 한국이다. 한국 바로 위에서 일본과 터키가 경합한다.

 

OECD 회원국 대부분이 유럽 선진국이고 그들은 우리와 사회·경제적 수준이 다르지 않느냐고 항변할 수도 있다.

 

그래서 유럽은 물론 미국·캐나다를 배제한 아시아·태평양지역 주요 국가의 이사회내 여성 비율을 따진 지표도 있다. 불행히도 한국은 2.1%로 아·태지역에서도 꼴찌다.

우리나라의 여성임원 비율이
그나마 이정도 수준이라도 유지되는 건 물컵갈질의 주인공 조현민 전 대항항공 전무처럼 총수일가의 경영참여가 있기 때문이다. 총수일가를 빼면 여성들에게 유리천장은 철벽이나 다름 없다.

 

유럽도 처음부터 여성들의 고위직 진출이 활발했던 것은 아니다. 제도적인 노력이 더해진 결과다. 노르웨이는 2003년 여성 이사의 비율이 9% 수준이었는데 10년 후인 2012년 40%로 증가했다. 여기에는 ‘여성임원할당제’라는 제도가 있었다.

 

노르웨이는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2인 혹은 3인의 임원이 있는 경우 반드시 양성이 있어야 하고 ▲4인 혹은 5인의 임원이 있는 경우 양성은 최소한 각각 2인 ▲6인에서 8인의 임원이 있는 경우 양성은 각각 3인 이상 ▲9인 혹은 그 이상인 경우 양성은 각각 40%를 차지해야하는 법을 만들었다.

 

노르웨이에서 본격화된 여성임원할당제는 핀란드(도입연도 2014년), 아이슬란드(2006년), 스페인(2007년), 네덜란드(2010년),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2011년), 독일(2015년) 등으로 확산됐다. 아시아에서는 2011년 말레이시아가 가장 먼저 이사회의 30%를 여성으로 선임해야한다는 제도를 만들었다.

 

 

◇ 꼴찌 다투던 일본마저도 변심(?)

 

한국과 함께 여성임원을 적게 배출하는 것으로 경합을 다투던 일본마저도 아베정부의 이른바 '우머노믹스' 기치 아래 여성관리직비율을 2020년까지 30%로 끌어올리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다양한 제도를 시행중이다. 일본 금융청과 도쿄증권거래소가 마련한 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에 여성임원 할당 등 다양성을 확보하도록 규정하고, 일본 공적연금(GPIF)도 여성친화적인 기업에 투자를 늘리고 있다.

 

지난 22일 국회에서는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실과 세계여성이사협회가 주최한 '여성임원할당제 세계적 추세와 우리의 과제'란 세미나가 열렸다. 이번 세미나를 계기로 향후 이사진 또는 회사임원의 일정비율을 여성 몫으로 배정하는 내용의 법을 만드는 작업이 가시화될 것으로 보인다.

 

국가마다 여성임원할당제를 도입하는 형태는 다르다. 가장 먼저 시작한 노르웨이에서는 할당제를 준수하지 않으면 상장폐지까지 시킬 수 있는 강력한 법을 만들었고 여성임원비율을 33%로 규정한 이탈리아도 경고, 벌금을 거쳐 최고 수위 제재로 이사회 폐지까지 가능하다.

 

반면 임직원 250명 이상의 상장기업을 대상으로 여성임원 40% 할당제를 실시하는 스페인은 패널티보다는 인센티브 정책에 방점을 두고 있다. 정부와의 계약에 우선권을 가지는 형태다. 핀란드와 네덜란드, 벨기에, 호주 등은 여성임원할당제를 시행하되 지키지 못하면 이유를 설명해야하는 'Comply or Explain'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연성규범 형태인 스튜어드십코드 운영방식과 유사하다.

 

 

◇ 이유없는 차별해소…지배구조 개선

 

따라서 한국에서도 여성임원할당제 논의가 본격화되면 ▲여성임원비율을 몇 퍼센트로 해야할지 ▲할당을 지키지 못하면 어느 수준의 제재를 해야 할지 ▲유예기간을 두고 단계적으로 시행해야 할지 ▲초기에는 의무보다는 권고사항으로 해야 하는 것 아닌지 등 각론에서 다양한 논쟁이 나타날 것으로 보인다.

 

누구를 임원으로 채용할지는 기업의 의사결정인데 법률적으로 강제하는 것이 타당하느냐는 문제, 여성에게 임원자리를 할당하면 그만큼 남성이 역차별 받을 수 있다는 반론, 같은 여성이라도 '나는 할당이 아닌 능력으로 승진했다'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심리 등도 논쟁거리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여성임원을 늘리는 문제를 단지 ‘여성에 대한 특혜’라는 시각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이유없는 차별을 해소하고 이사회의 다양성을 확보한다는 지배구조 개선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여성임원할당제를 먼저 도입한 유럽에서도 논쟁과 저항이 없었을 리 만무하다. 결과는 이사회에 여성의 진출이 늘어나면서 재무성과가 높아지는 등 순기능이 확인됐다.

여성임원할당제 도입 연구를 진행한 김경석 법학박사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여성의 사회진출을 지원하는 제도들은 기본적으로 고용기회를 늘리고 일 가정을 양립하도록 지원하는 목적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뒷받침하는 것은 아니다”며 “여성임원할당제는 여성에 대한 우대가 아니라 동일한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고위직에 진출하지 못하는 ‘이유 없는 차별’을 해소해 가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여성임원할당제와 관련한 입법을 검토 중인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세미나에서 “여성할당제를 통한 이사회 구성의 다양성 확보는 경영의 효율성에 기여할 뿐 아니라 지속가능한 성장을 가능케 해주는 요소”라며 “조직 내 여성임원 비율의 확대는 평등한 의사결정과 조직문화 형성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며 국가경쟁력을 키우기 위한 핵심 과제”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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