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명품 브랜드와 초대형 복합공간을 앞세운 유통 빅3가 전국 쇼핑 상권의 지도를 바꿔놓았습니다. 한때 지역 소비를 이끌었던 향토 백화점들은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하나둘 자취를 감췄죠. 이에 비즈워치에서는 마지막 향토백화점인 대구백화점의 사례를 바탕으로 향토백화점이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한계를 살펴보고 나아가 지역 거점을 장악한 대형 유통사들의 새로운 공략법을 조명해보려 합니다.[편집자]
지방 거점 도시의 중심에는 늘 백화점이 있었다. 지역민은 그곳에서 만나 쇼핑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이처럼 지역을 대표하던 향토 백화점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있다. 무엇이 이들의 운명을 바꿨을까.
잇단 퇴장
1944년 대구상회로 출발해 1969년부터 대구 동성로를 지켜온 대구백화점이 새로운 주인을 맞이한다. 세경인베스트 등이 구정모 대구백화점 회장 일가로부터 지분을 인수하며 경영권 변경을 앞두고 있어서다. 반세기 넘게 유지돼 온 오너 경영 체제가 사실상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대구백화점은 한때 대구 동성로의 랜드마크이자 지역 소비의 중심이었다. 그러나 경영난이 이어지면서 2021년 동성로에 있는 본점은 영업을 중단했다. 현재는 대구 중구에 있는 프라자점만 영업을 이어가고 있다. 2017년 문을 연 대백아울렛 동대구점도 17개월 만에 영업을 종료했다. 지역을 대표하던 백화점이 사실상 한 곳의 점포만 남긴 채 새로운 생존 방식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놓인 셈이다.
지역 향토 백화점의 쇠퇴는 대구만의 일이 아니다. 부산에서는 1997년 외환위기를 전후해 향토 백화점들이 잇따라 무너졌다. 부산 최초의 향토 백화점인 '미화당'은 1997년 10월 최종 부도 처리됐고 두 달 뒤에는 '세원백화점'과 '신세화백화점'도 잇따라 최종 부도를 냈다. 당시 이들은 매장을 확장하고 몸집을 키웠지만 대규모 투자로 늘어난 비용 부담을 매출 성장으로 상쇄하지 못했다. 여기에 외환위기까지 겹치며 결국 자금난을 감당하지 못했다.
물론 모든 향토 백화점이 폐점으로 끝난 건 아니다. 일부는 대형 유통사에 인수되며 간판을 바꿔 달았다. 울산의 '주리원백화점'은 1998년 현대백화점 운영사인 금강개발산업이 경영권을 인수한 뒤 현대백화점으로 재편됐다. 대전의 '동양백화점'도 2000년 한화그룹에 인수된 뒤 한화타임월드로 재편됐고, 현재는 갤러리아 타임월드로 운영되고 있다. 지역 백화점이 독자 생존하는 대신 대형 자본에 편입되는 방식으로 명맥을 이어간 사례다.
대구에서는 '동아백화점'이 2010년 이랜드리테일에 매각됐다. 동아백화점은 1972년 대구에 본점을 연 뒤 대구백화점과 함께 지역 유통시장을 대표해 왔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이랜드리테일이 화성산업의 백화점 5곳과 대형마트 2곳 등 유통사업 부문을 2680억원에 인수하면서 지역 독립 백화점으로서의 역사는 막을 내렸다.
광주에서는 '송원백화점'이 1998년 현대백화점의 위탁경영을 받으며 독자적인 향토 백화점에서 대형 유통사 체제로 전환됐다. 현대백화점은 송원백화점에 현대백화점 상호와 로고를 사용하게 하고 핵심 경영부문에 인력을 파견했다. 전북의 향토 백화점 '코아백화점'은 만성적자와 매각 작업 장기화 끝에 2010년 8월 문을 닫았다.
랜드마크 역할을 하던 향토 백화점의 퇴장은 최근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대전에서 오랜 기간 지역 백화점의 명맥을 이어온 백화점세이도 2024년 5월 영업을 종료했다. 마산의 '대우백화점'은 그룹의 위기로 2015년부터 '롯데백화점 마산점'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그러나 롯데백화점 인수에도 매출 부진으로 2024년 6월 문을 닫았다.
기준이 달라졌다
과거 향토 백화점은 단순한 상업 공간이 아니었다. 상품을 직접 보고 구매할 수 있는 오프라인 유통망이 지금처럼 다양하지 않았던 시절, 백화점은 가장 좋은 상품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자 지역민의 약속 장소였다. 각 지역의 소비력을 기반으로 성장한 이들은 지역 경제를 대표하는 기업이기도 했다.
향토 백화점의 첫 번째 시련은 1990년대 중후반에 찾아왔다. 1997년 외환위기(IMF)라는 거대한 금융 충격을 맞닥뜨리면서다. 소비 위축과 금리 인상, 자금 경색이 겹치면서 자본력이 약했던 향토 백화점들이 가장 먼저 연쇄 부도를 맞았다. 부산의 미화당, 광주의 화니·태산, 울산의 황태자백화점 등이 이 시기에 속절없이 간판을 내렸다.
동시에 유통시장의 경쟁 구도도 달라졌다. 롯데·신세계·현대백화점 등 전국 단위 대형 유통사들이 지방 대도시로 진출하기 시작하면서다. 지역 소비자를 기반으로 성장해 온 향토 백화점과 전국적인 자본력과 운영 경험을 갖춘 대형 유통사 사이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규모의 차이가 경쟁력의 차이로 이어졌다. 대형 유통사는 대규모 매입을 통해 브랜드와의 협상력을 높였다. 이를 바탕으로 상품 구성과 브랜드 유치 경쟁에서도 앞서갔다. 해외 명품 브랜드 수입이 본격적으로 확대되면서 이 격차는 더 커졌다. 대형 유통사들은 막대한 자본력을 앞세워 명품 브랜드를 확보했다.
대규모 리뉴얼도 이어갔다. 백화점은 상품을 판매하는 공간을 넘어 유명 F&B와 문화시설, 전시, 팝업스토어 등을 결합한 체류형 복합공간으로 진화했다. '무엇을 살 것인가'뿐 아니라 '얼마나 오래 머물 것인가'가 새로운 경쟁 기준이 됐다.
경쟁의 무대도 달라졌다. 도시가 확장되면서 인구와 상권은 기존 원도심에서 신도시와 외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지역 중심 상권에 자리 잡아온 향토 백화점들은 새로운 소비 거점으로 쉽게 이동하지 못했다. 과거에는 가장 큰 강점이었던 입지가 도시 구조의 변화와 함께 가장 큰 약점이 된 셈이다.
그사이 소비자의 구매 방식도 달라졌다. 가격과 편의성이 중요한 생필품은 쿠팡과 네이버 등 이커머스로 이동했다. 대형 백화점은 명품과 패션, 미식, 문화 콘텐츠를 앞세워 오프라인만의 경쟁력을 강화했지만 향토 백화점은 온라인과 오프라인 어느 쪽에서도 뚜렷한 경쟁 우위를 확보하지 못했다.
결국 자금난에 빠진 향토 백화점들은 문을 닫거나 대형 유통사에 인수되며 시장에서 하나둘 사라졌다. 지역을 대표하던 백화점들도 부도나 매각을 거치며 독자적인 향토 기업으로서의 지위를 잃었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지역에서 좋은 입지를 확보하고 상품을 갖추는 것만으로도 백화점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규모와 자본력, 콘텐츠 경쟁력까지 함께 요구되는 시대"라며 "향토 백화점의 폐점은 특정 유통 업태의 몰락에 그치지 않고 지역의 자본과 문화 중심축이 수도권과 대기업으로 귀속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