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명품 브랜드와 초대형 복합공간을 앞세운 유통 빅3가 전국 쇼핑 상권의 지도를 바꿔놓았습니다. 한때 지역 소비를 이끌었던 향토 백화점들은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하나둘 자취를 감췄죠. 이에 비즈워치에서는 마지막 향토백화점인 대구백화점의 사례를 바탕으로 향토백화점이 몰락할 수밖에 없었던 구조적 한계를 살펴보고 나아가 지역 거점을 장악한 대형 유통사들의 새로운 공략법을 조명해보려 합니다.[편집자]
"대백 앞에서 3시에 만나자."
대구 동성로 중심부에 자리한 대구백화점 본점은 친구를 만나고, 식사하고, 최신 유행을 살피던 대구의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였다. 1969년 문을 연 뒤 수십 년간 동성로로 유동인구를 끌어모으며 대구 상권의 중심 역할을 했다.
하지만 2021년 6월 영업을 끝으로 본점의 시계는 멈췄다. 코로나19 확산으로 동성로 상권이 직격탄을 맞은 데다, 전국 단위 대형 유통사의 공세까지 겹치면서 경영난을 견디지 못했다. 한때 지역 소비의 중심이었던 대구백화점은 이제 새로운 주인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다.
상권 침체 '신음'
대구백화점 본점 앞. 굳게 닫힌 출입구와 비어 있는 건물은 동성로 한복판에 그대로 남아 있다. 창업 80여 년 만에 오너 경영 체제를 끝내고 최대주주 변경을 앞둔 대구백화점의 모습은 한때 지역 유통을 이끌었던 향토 백화점의 달라진 위상을 실감하게 했다.
백화점이 동력을 잃자 주변 상권 전체가 연쇄적으로 침체의 늪에 빠졌다. 백화점으로 유입되던 소비자가 빠져나가면서 동성로 일대 식당과 의류 매장으로 이어지던 발길도 뜸해졌다. 한창 오가는 사람이 많아야 할 주말 오후임에도 거리는 한산하기만 하다.
지난 25일 동성로에서 만난 이 모씨(37)는 "예전에는 친구들과 약속을 잡을 때 '대백 앞에서 보자'는 말을 자연스럽게 했다"며 "백화점에서 쇼핑하지 않더라도 대백을 중심으로 동성로를 돌아다니곤 했는데 지금은 건물 앞을 지날 때마다 허전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유동인구가 줄면서 주변 상점들의 영업 환경도 악화했다. 한 집 걸러 한 집은 간판만 남겨두고 영업을 중단한 상태였다. 대형 브랜드 매장이 빠져나간 2~3층 건물에 '임대' 안내문이 붙은 점포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대백 본점 인근에서 액세서리 매장을 운영하는 한 상인은 "예전에는 대백에 온 손님들이 자연스럽게 주변 상점까지 둘러봤지만 본점이 문을 닫은 뒤에는 이곳을 찾는 사람 자체가 줄었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대구의 대표적인 원도심 상권이었던 동성로는 소비 중심이 동대구와 수성구 등으로 분산되고 온라인 쇼핑이 확대되면서 과거만큼의 집객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다. 쇼핑 수요는 동대구역의 대구신세계로, 젊은 층을 중심으로 한 식음·주류 소비는 교동이나 수성못 인근으로 이동했다. 한때 대구에서 가장 번화했던 동성로 시대가 저물고 여러 소비 거점이 공존하는 구조로 바뀐 셈이다.
대구의 상징 '대백'
대구백화점은 대구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에서도 상징적인 점포다. 1944년 대구상회로 출발해 1969년 동성로에 본점을 열었고 이후 대백프라자와 대백몰 등을 잇따라 선보이며 대구·경북을 대표하는 유통기업으로 성장했다. 1988년에는 향토 백화점 중 최초로 유가증권시장(코스피)에 상장하기도 했다.
전성기에는 전국 단위 백화점과도 어깨를 나란히 했다. 특히 1993년 문을 연 대백프라자는 1999년 지방 백화점 최초로 단일 점포 연매출 3000억원을 돌파하며 전국 백화점 매출 순위 7위에 올랐다.
대백프라자는 루이비통과 샤넬, 까르띠에 등 해외 명품 브랜드를 유치하며 대구·경북 지역의 소비력을 상징하는 백화점으로 자리 잡았다. 2003년 롯데백화점이 대구에 진출한 이후에도 대백프라자는 지역 소비자들의 발길을 붙잡으며 경쟁력을 유지했다.
하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대구의 소비 지형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롯데백화점 부산본점과 신세계백화점 센텀시티점 등이 대규모 명품 매장과 차별화된 쇼핑 환경을 앞세우면서 대구의 고소득 소비층 일부가 부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구백화점이 대구·경북 지역의 소비 수요를 흡수하던 구조에도 균열이 생긴 셈이다.
결정적인 변화가 찾아온 것은 2016년 신세계백화점이 동대구역에 대구신세계를 열면서다. 대구신세계는 백화점과 대형 쇼핑·문화시설을 결합해 동대구역 일대에 새로운 소비 거점을 형성했다. 신세계가 문을 열자 대구백화점에 입점해 있던 명품 브랜드들이 잇따라 철수하면서 대백의 집객력도 약화됐다.
대구백화점은 본점과 프라자점의 경쟁력 강화에 나섰지만, 신세계와의 격차를 좁히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대구백화점은 2016년 처음으로 영업적자를 기록한 이루 매년 적자를 기록하고 있다. 매출은 2015년 1583억원에서 지난해 531억원으로 10년 사이 3분의 1 수준으로 급감했다.
대백의 미래는?
이제 대구백화점의 과제는 남겨진 건물과 부지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다. 대구백화점은 본점 건물과 토지, 현대시티아울렛, 물류센터 등 유휴 자산의 매각을 추진해 왔지만 5년 넘게 뚜렷한 매수자와 활용 방안을 찾지 못했다.
그러나 최근 최대주주 변경이 예고되면서 상황은 새로운 국면을 맞고 있다. 구정모 대구백화점 회장 등 기존 최대주주 측은 보유 지분 25.8%를 세경인베스트 등에 약 223억원에 매각하는 계약을 체결했다. 현재 계약금과 1차 중도금만 지급된 상태다. 다음 달 25일까지 2차 중도금과 잔금이 납부되면 거래가 최종 종결된다.
세경인베스트 측은 이미 대구백화점의 사업 재편 방향을 공개했다. 본점은 대구시와 중구청 등이 참여하는 민·관 합동 개발 방식과 함께 주상복합, 시니어 레지던스, 오피스텔 등으로 개발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기존 오프라인 중심의 유통 사업은 온라인 플랫폼 중심으로 전환하고 대백프라자는 상품 판매 중심의 백화점에서 복합문화공간 형태의 임대형 시설로 재편한다는 구상도 내놨다.
다만 이는 아직 인수 예정자 측의 구상일 뿐 본점 개발 방식이나 유휴 자산 활용 계획이 확정된 건 아니다. 경영권 이전이 마무리된 뒤 구체적인 사업계획과 자금 조달 방안이 마련돼야 실제 개발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럼에도 대구백화점의 변화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수십 년간 지역민의 소비와 만남을 책임졌던 향토 백화점이 더 이상 기존의 유통 모델을 유지하기 어려워지면서 부동산 개발과 임대 사업을 중심으로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대백이 과거의 백화점 모델을 그대로 되살리기보다는 동성로만의 입지와 지역성을 활용해 대형 유통사와 차별화된 역할을 찾을 수 있을지가 관건"이라며 "대백의 변화는 한 향토기업의 사업 재편을 넘어 지역을 대표하던 유통시설이 달라진 소비 환경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시험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