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체스터 시티(이하 맨시티) '넘버 나인' 유니폼에 궁서체로 '홀란'이 박혀 있다. 그 유니폼이 걸린 병풍에는 한복을 입은 홀란의 얼굴이 새겨져 있다. 서울 성수동에 마련된 푸마와 맨시티의 팝업 풍경이다. 과거 한국적인 요소를 알리는 데 급급했던 한글 마케팅이 이제는 글로벌 브랜드와 스포츠 구단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디자인 요소로 확장되고 있다.
맨시티 유니폼에 새겨진 한글
맨시티는 한국 선수가 없음에도 국내 팬들에게 '한국에 진심인 구단'으로 유명하다. 광복절이나 수능 등 한국의 주요 기념일마다 공식 SNS를 통해 한글로 메시지를 올리는 구단이다. 푸마는 이 같은 맨시티의 '한국 사랑'에 주목했다. 맨시티의 방한을 계기로 한국 팬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기로 하고 지난 3월부터 팝업 준비에 들어갔다.
푸마가 가장 먼저 고민한 것은 '한국적인 것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였다. 그렇게 지난 5일 서울 성수동에 문을 연 팝업은 전통적인 소재를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한국의 미감을 현대적으로 보여주는 데 초점을 맞췄다. 자개를 활용해 맨시티의 구단 요소를 결합하고 병풍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공간에 녹였다.
한글 역시 단순히 '보여주는 데' 그치지 않고 문자 자체가 가진 조형미를 살리는 데 집중했다. 서예가 솔뫼 정현식 작가와 협업해 맨시티 선수들의 이름과 등번호에 한글 서예체를 적용했다. 팝업을 찾은 맨시티 선수들은 자신의 동양화 초상화와 한글 서예 마킹 유니폼을 입고 만족감을 표하기도 했다. 실제 맨시티 구단 내부에서도 한글 서체에 대한 반응이 좋아 향후 별도 판매 가능성을 타진할 정도로 관심을 보였다는 후문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한글을 문자에서 디자인으로 확장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푸마는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의 '2026 글로벌 대중 브랜드 K-Text 확산 사업'과 연계해 디자인 스튜디오 슈퍼포지션과 한글의 조형미를 담은 컵과 접시, 소반 등을 제작했다. 맨시티 2026/27시즌 원정 유니폼의 벌 모티브를 활용해 꿀벌과 벌집을 형상화하고 한글의 조형미를 더했다.
한글을 패션으로
이번 팝업에서는 한글을 보다 일상적인 패션 아이템으로 풀어낸 제품도 선보였다. 홈 어센틱 저지 구매 고객에게 한정판으로 제공된 '하우스오브낭만'의 스페셜 볼캡이다. 푸마가 하우스오브낭만을 선택한 배경에는 '낭만'이라는 단어와 축구의 연결고리가 있었다. 푸마는 축구와 '낭만'을 연결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하우스오브낭만과 인연을 맺었고, 맨시티 방한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협업 범위를 넓혔다.
민태홍 푸마 축구 마케팅 담당자는 "'낭만'이라는 키워드가 축구라는 스포츠의 본질과 통한다는 점에 주목했다"면서 "해외 팬들에게는 한글 로고로 호기심을 자극하고 국내 팬들에게는 강렬한 브랜드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판단해 협업을 진행하게 됐다"고 말했다.
하우스오브낭만에게 이번 협업은 한글을 전면에 내세운 브랜드의 가능성을 글로벌 무대에서 확인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그동안 국내 패션 시장에서는 한글을 활용한 제품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다. 정통 패션 시장에서 한글을 전면에 내세운 브랜드가 성공하기 어렵고, 자칫 관광지 기념품처럼 보일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다.
하우스오브낭만은 한글 자체를 강조하기보다 전체 디자인 안에서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하는 데 집중했다. 구상우 하우스오브낭만 대표는 "맨시티라는 대형 구단의 정체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우리 브랜드의 한글 로고가 단순 굿즈처럼 보이지 않도록 대중적인 밸런스를 잡는 데 집중했다"며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짧은 준비 기간이었지만 긴장감 속에서 완성도 높은 결과물을 만들어냈다"고 밝혔다.
한글에 대한 국내 소비자의 인식도 달라지고 있다는 게 구 대표의 설명이다. 그는 "외국인들 눈에는 한글이 아름답다고 느끼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글자 자체로 바라보는 경향이 컸다"면서 "이번 협업 모자에 대한 반응을 봤을 때 한글에 대한 거부감이 많이 사라진 게 느껴졌다"고 말했다.
세계로 간다
한글이 패션과 스포츠에서 디자인 요소로 활용되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글로벌 패션업계에서는 샤넬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샤넬은 2015년 서울에서 열린 '샤넬 크루즈 쇼'에서 '한국', '서울', '코코', '샤넬' 등의 글자를 의복 전면에 부각해 선보였다. 이탈리아 명품 브랜드 구찌는 2023년 설날을 앞두고 한국 한정 컬렉션을 선보이면서 티셔츠와 후드 등에 브랜드명 'GUCCI'를 한글 '구찌'로 표기했다.
스포츠에서도 비슷한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해외 축구 구단들이 한국을 찾으면서 한글과 한국적 디자인을 활용한 유니폼과 마킹을 선보이는 사례가 늘고 있다. 바이에른 뮌헨은 2024년 첫 방한을 앞두고 선수 이름을 한글로 표기한 유니폼을 공개했고, 넘버링에는 한국 전통 건축과 단청에서 영감을 받은 디자인을 적용했다. 최근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도 방한을 계기로 이강인의 등번호 7번에 한국 축구를 상징하는 디자인을 더하는 등 한국적 요소를 담은 특별 마킹을 선보였다.
이처럼 글로벌 스포츠 구단과 브랜드가 한글을 적극 끌어안는 배경에는 달라진 한국 문화의 체급이 있다. K콘텐츠를 필두로 한 K컬처의 확산은 우리 문화를 이루는 근본 요소인 '한글'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한글이 한국 시장을 겨냥한 일차원적 마케팅 도구를 넘어, 브랜드의 정체성을 입히고 독창적 미감을 전달하는 핵심 디자인 자산으로 진화한 셈이다.
업계에서도 한글 마케팅이 단순한 유행을 넘어 하나의 디자인 영역으로 자리 잡을 가능성에 주목한다. 업계 관계자는 "한국 문화에 대한 글로벌 관심이 커지면서 한글을 활용할 수 있는 영역도 자연스럽게 넓어지고 있다"며 "앞으로는 패션과 스포츠뿐 아니라 음악, 여행, 공연, 영상 등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서 한글을 활용한 협업이 더 활발해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