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반도체 기업들은 기술격차를 단번에 줄이기 위해 미국과 대만 반도체 기업에 대한 인수합병 시도, 지분투자를 이어가고 있다."-SK하이닉스 회사채 투자설명서(2018년 8월)
SK하이닉스가 중국 반도체 기업들의 동향에 촉각을 세우고 있다. 단순히 인력 빼가기에 그치지 않고 기업을 통째로 사들여 한국이 우위를 차지한 지금의 경쟁구도를 흔들 수 있다는 위기의식에서다.
SK하이닉스가 지난 27일 회사채 3400억원어치를 발행하면서 제출한 투자설명서에는 이 같은 걱정이 곳곳에 담겨있다.
구체적으로 보면 SK하이닉스는 ▲글로벌 경기둔화 ▲PC와 모바일 등 전방산업 수요변화 ▲반도체 수급상황 ▲경쟁심화 ▲기술적 한계 ▲원재료 및 환율 변동 ▲보호무역주의 등 7가지를 핵심사업위험으로 꼽았다. 이 가운데 경쟁심화와 보호무역주의 항목에서 중국의 위협을 다뤘다.
현재 중국은 오는 2025년까지 반도체 자급율을 70%까지 끌어올리겠다는 내용의 '중국제조 2025'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그 전면에 나선 곳이 중국 최대 반도체 회사인 칭화유니그룹이다. 칭화유니는 2015년 세계 3위의 D램 회사인 미국 마이크론을 230억달러(약 27조원)에 인수하려 했으나 마이크론 이사회의 제동으로 무산됐다. 같은 해 세계 3위 낸드플래시 회사인 샌디스크에 대한 우회 인수도 시도했으나 미국 정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칭화유니는 SK하이닉스에도 손을 뻗었다. 2015년 11월 SK하이닉스에 지분 15~20%를 인수할테니 중국에 공장을 세워달라고 제안한 것이다. SK하이닉스의 거절로 '없던 일'이 됐지만 국내에서도 중국의 야심을 확인할 수 있던 사건이다.
그렇다고 M&A가 완전한 실패로 끝난 것도 아니다. 칭화유니는 반도체 후공정업체인 대만 파워텍의 지분 25%를 약 6억달러(6800억원)에 인수했고 2016년에는 애플 그래픽칩 설계사인 이미지네이션 테크놀로지스그룹의 지분 3%를 사들였다.
칭화유니는 자체적인 몸집 불리기에도 나서 현재 중국 우한에 산하기업인 창장 스토리지 테크놀로지의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다. 투자금액만 27조원에 달한다.
SK하이닉스를 더욱 긴장하게 만든 것은 이 같은 중국의 '반도체 굴기'가 한국을 위협할 수준에 다다르고 있다는 점이다.
칭화유니의 계열사인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YMTC)는 애플과 아이폰에 탑재할 낸드플래시의 공급계약을 논의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SK하이닉스는 투자설명서에서 "애플이 중국기업의 반도체를 탑재하게 될 경우 모바일용 반도체 최대 시장인 중국의 스마트폰 업체들도 중국기업의 반도체를 탑재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올해 상반기 SK하이닉스 전체 매출에서 중국 비중은 38.6%(7조3721억원)에 달했다. 대만까지 포함하면 전체 매출의 절반 가량인 약 9조원이 중화권에서 발생했다. 중국 기업들이 자국산 반도체를 쓰기 시작하면 SK하이닉스는 가장 큰 시장을 잃을 위험을 안게 된다.
투자설명서는 "현재 중국 정부는 범국가적 차원에서 반도체 산업을 핵심 산업으로 선정해 육성하고 있다"면서 "중국 기업들이 D램과 낸드플래시 시장에 안착할 경우 전반적인 메모리 반도체 시장의 경쟁이 강화돼 수익성이 저하될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특히 중국의 위협은 반도체 슈퍼사이클이 시작된 2년전에 비해 강도가 한결 세졌다. 당시 SK하이닉스는 중국 기업들의 인력 빼가기에 상당한 우려를 나타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핵심 인력을 유치하면 다른 반도체 업체가 가진 노하우를 단기간에 습득할 수 있으므로 중국 반도체 회사들은 인재 영입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업계 내에서는 중국 반도체 기업의 영입 제의를 받은 연구인력들이 최소 100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SK하이닉스 회사채 투자설명서(2016년 5월)
이번에는 인력유출보다 중국 기업의 인수합병과 생산능력 확대에 더 큰 비중을 뒀다. 중국의 기술력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 YMTC는 이달 초 미국 반도체산업의 심장부인 실리콘밸리에서 3D 낸드플래시 시제품을 공식 발표하는 등 기술력에서도 자신감을 나타내고 있다.
SK하이닉스는 미국과 중국간 무역갈등에서 불똥이 튀는 점도 걱정했다.
중국 법원이 마이크론의 D램과 낸드플래시 제품에 중국 내 판매금지 예비명령을 내리는 등 국외에서 생산된 반도체 제품에 무역 규제를 가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투자설명서는 "이러한 무역 규제 대상에 한국산 제품이 포함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