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국내 조선업계는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러브콜로 역대급 호황기를 맞았다. 노후화된 미국 조선업을 재건하기 위해 기술력을 갖춘 국내 기업에 적극적으로 손을 내밀며 양국의 협력이 활성화되는 모양새다. 다만 업계에서는 양국의 조선업이 성공적으로 협력해 공동 성장하기 위해서는 제도적 뒷받침이 우선돼야 한다고 보고 있다."韓 조선업 큰 기회"
15일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한미 산업협력 컨퍼런스'에서는 한·미 산업협력이 유력한 조선·방산, 에너지, AI·반도체 분야의 구체적 협력방안이 논의됐다. 특히 이날 조선·방산분야 전문가들은 미국의 함정 노후화와 건조 능력 부족을 지적하며, MRO(유지·보수·정비)와 건조분야에 양국의 협력 기회가 있다고 조언했다.
발제를 맞은 로버트 피터스 헤리티지 재단 선임연구원은 "미국의 함정, 항공기, 탄약은 유사시 전력 대응에 충분하지 않다"며 "노후함정의 정비 수요 급증에 따라 조선소 공간이 잠식돼 신규함정 건조까지 지연되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때 선박 건조량 1위였던 미국 조선업은 2000년대 이후 쇠락의 길을 걷고 있다. 건조 역량이 후퇴하며 해군력이 약화했고, 생태계까지 무너진 상태다. 이에 미국 해군은 향후 30년간 364척을 건조하는데 1조750억달러(1600조원)를 투입할 계획이다. 이 계획에 동참할 만한 가장 유력한 동맹국이 조선업 강국인 한국이다.
이날 패널토론에 참석한 정우만 HD현대중공업 상무는 미국의 이같은 계획에 대해 "지금의 상황만을 놓고 본다면 상당히 도전적인 과제"라고 지적하며, "조선소만 있다고 해서 배를 잘 만드는 게 아니라 잘 갖춰진 공급망과 풍부한 인력시장, 연구개발 역량, 정부 정책 등이 한 방향으로 이어진 에코 시스템이 구축돼야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이 미 해군 함정 MRO 사업 진출에 공을 들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미 해군의 MRO 사업은 연간 20조원 규모의 거대한 시장이다.
정 상무는 "미국 함정의 MRO 지원을 본격화하고 건조 분야까지 협력 범위를 확대한다면 미 해군의 전투 준비태세 향상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며 "이는 어떠한 형태로든 대한민국 조선업에는 큰 기회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넘어야 할 산 많다
이날 전문가들은 양국의 협력이 더욱 활발하게 이뤄지기 위해서는 미국의 법령 개정이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로버트 선임연구원은 "건조분야에서 협력을 이루기 위해서는 존스법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정 상무 역시 "존스법, 번스-톨레프슨법 때문에 선박과 함정을 해외에서 건조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어 법적 규제 선결이 필수적"이라고 언급했다.
1920년 안보 강화 차원에서 제정된 존스법은 미국 연안 항구를 오가는 선박은 미국에서 만들어져야 한다는 게 골자다. 번스-톨레프슨 수정법은 미군을 위한 모든 선박과 그 주요 부품을 외국 조선소에서 건조해선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 상무는 "MRO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리지만, 사실 굉장히 제한적인 기회만 열려 있는 상태라 상황적인 논리로 장밋빛 미래만을 예측하기엔 시기상조"라며 "현재는 해군 7함대에 한해서만 MRO를 할 수 있어 법적으로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게 사실"이라고 짚었다.
이들은 오랜 기간 쌓여온 미국의 공고한 법적 제약을 넘기 위해서는 견고한 한미 동맹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데도 의견을 모았다.
로버트 선임연구원은 "미국과 한국은 모든 목적과 목적을 위해 각 방위 산업을 진정한 자유무역지대로 만들어야 한다"며 "한미 양국이 상호 국방조달협정(RDP: 방산분야 자유무역협정)을 체결해 한국산 무기체계를 더 유연하게 확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석준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전무도 이 의견에 동의하며 "한국 방산 산업이 자유무역지대로 선정되면 한국이 글로벌 국가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정 상무 역시 "동일한 목적을 공유하는 경제안보공동협의체가 필요하다"며 "핵잠수함이라는 공동의 아젠다를 갖고 미국·영국·호주가 협력하는 오커스(AUKUS)와 같은 구체화된 안보동맹 협의체로 격상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 MRO 사업 진출을 위해 국내 업체들 간 협력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김대영 한국국자전략연구원 군사전문 연구위원은 "우리 업체 간에 경쟁을 하다보면 출혈 경쟁이 발생할 수밖에 없고, 이에 따른 저가 수주 우려도 있다"며 "G to G(정부 대 정부) 방식의 MRO 수주 방식을 고려하거나 국내 조선소 간 협의체를 구성해 미 해군 MRO를 일괄 수주하는 것도 진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