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고랜드 사태 충격으로 부동산프로젝트파이낸싱(PF) 시장의 돈줄이 바짝 말라붙었다. 지방자치단체가 보증을 선 자산유동화어음(ABCP) 조차 불확실하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시장의 수요는 자취를 감췄다.
그 결과 증권사가 보증을 선 PF 자산유동화물은 찬밥 신세로 전락했다. 채무 발행이 코앞에 닥친 증권사들은 현금 확충에 나섰지만, 상대적으로 자본 여력이 부족한 중형사를 중심으로 공포심이 팽배하다.
이런 분위기를 감지한 금융당국은 부랴부랴 5조원 규모의 증권사 유동성 충원 정책을 내놨다. 그럼에도 중형사들을 사이에선 '이걸로는 어렵다'는 아우성이 나온다. 이 가운데 증권업계가 자체적으로 조성하는 1조원대 제2 채안펀드가 추가 카드로 거론된다.
금리 8%대도 '시큰둥'...현금 쌓기 총력
28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최근 증권사들이 매입보장 또는 매입확약한 부동산PF 자산유동화물은 8%대 금리에 거래되고 있다.
지난 25일 한국투자증권이 보증을 선 1개월 만기 자산유동화단기전자사채(ABSTB)는 7.40~7.45%로 유통됐다. 같은 날 키움증권이 매입확약한 2개월물은 8.00~8.45%로, 하이투자증권이 보증한 1개월물은 8.5%로 거래됐다. 이들은 모두 단기채 최고 등급인 'A1'등급을 받은 ABSTB다.
지난달 말까지만 해도 똑같은 신용등급과 만기를 가진 ABSTB가 4%대 금리로 유통됐지만, 지금은 두 배 더 높은 금리를 쳐줘도 수요를 모집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만큼 레고랜드 디폴트 여파로 부동산PF 시장을 둘러싼 불확실성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차환발행에 실패하는 사례도 등장하고 있다. 한국투자증권과 BNK투자증권은 오는 28일 만기인 서울 강동구 둔촌주공의 재개발 시공 PF ABSTB 차환발행에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총 8250억원 규모의 ABCP 발행을 시도했지만 수요를 확보하지 못했다.
부동산PF 자산유동화물의 만기는 대부분 1~3개월가량으로 비교적 짧다. 신용평가업계에 따르면 연말까지 30조원에 가까운 증권사 보증 부동산PF 자산유동화물의 만기가 돌아올 것으로 전망된다. 차환에 실패할 경우, 증권사들은 스스로 채권을 인수해야 한다. 언제든 증권사의 신용경색을 촉발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효섭 자본시장연구원 연구위원은 "지난 2년간 증권사들이 수익을 많이 거둬들였던 만큼 재무구조는 좋은 상태다"라면서도 "당장 만기가 돌아오는 CP나 ABCP를 인수하지 못할 경우 유동성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에 증권업계에서는 단기자금을 모으기 위해 조달금리를 높이고 있다. 금융회사의 대표적인 자금 조달 수단인 발행어음과 CP 금리는 평균 5%대로 치솟았다. 역마진 부담마저 감수하며 현금 확보에 분주한 모습이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캐피털사는 주식연계채권을 10%대로 찍고, 일부 증권사는 표면금리 8%짜리 회사채를 발행한다는 얘기도 들린다"며 "회사 입장에서 만기 수익률을 보장하기 위해선 상당한 부담이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특히 자본금이 충분하지 않은 중형사들이 체감하는 위기감은 대형사 대비 크다. 그간 부동산PF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데다 PF가 대부분 중후순위 변제로 이뤄진 점도 부담을 가중한다.
한국신용평가에 따르면 올해 1분기 말 기준 자본 3조원 이상인 대형사의 중후순위 PF 익스포져(우발부채, 대출채권, 부동산펀드) 비중은 30%이다. 반면 중형사(자본 1조~3조원)와 소형사(자본 1조원 미만)의 비중은 각각 63%, 72%로 훨씬 높다.
이재우 한국신용평가 금융·구조화평가본부 수석연구원은 "중소형사는 고수익 추구, 영업력 신장, 제한된 자본력 활용 등 이유로 대형사 대비 부동산금융 전반에서 높은 위험인수 성향을 나타내고 있다"며 "중후순위 익스포져 비중이 전반적으로 크고, 브릿지론의 비중도 상당한 편"이라고 분석했다.
제2 채안펀드 검토...역풍 우려도
위기론이 흘러나오자 금융당국도 지원책을 마련했다. 증권사와의 환매조건부채권(RP) 거래와 증권 담보대출 방식으로 3조원을 공급하는 동시에 회사채·CP 매입 프로그램 중 2조원 가량을 증권사 CP 매입에 투입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중소형사를 중심으로 추가 지원 요구가 잇따르자 증권업계가 갹출을 통해 제2 채안펀드를 조성하는 안도 검토되고 있다. 우량채권을 자체적으로 소화해 중소형사의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24일에 이어 27일 미래에셋, 메리츠, 삼성, 신한투자, 키움, 하나, 한국투자, NH투자, KB증권 등 대형증권사 9곳이 모여 시장안정 방안을 논의했다. 다만, 펀드 구성 등 세부 내역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기존 정책으로는 신용등급이 낮은 중형사 회사채나 CP를 인수하긴 어렵고, 낙수효과를 기대하기에도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며 "중소형사 입장에선 현금조달이 잘 안되니 (제2채안펀드 조성을) 당국에 적극적으로 어필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출자 역할을 담당하게 된 대형사들 사이에선 갖가지 불만도 제기된다. 경쟁사를 돕는 건 자본시장 논리에 맞지 않을뿐더러 업무상 배임에 해당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한 대형 증권사 관계자는 "회사 사업 규모가 크면 채권뿐 아니라 파생상품에 대해서도 증거금을 더 내야 하는데, 금리가 오른 상황에선 그 부담이 더 크다"며 "개별 증권사의 문제를 업계가 함께 책임져야 한다는데 솔직히 의문이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선 은행권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시된다. 또 다른 대형 증권사 관계자는 "레고랜드 사태의 영향도 없진 않지만 연초부터 한국전력공사와 은행의 채권 투척이 시장 유동성을 쓸어 간 주범"이라며 "사태를 초래한 원인은 따로 있는데 증권업계에 뭔가를 요구한다는 발상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