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피난처에 유령회사를 설립한 기업인들의 명단이 연이어 공개되면서 파장이 커지고 있다. 이들이 조세피난처를 이용해 비자금 조성이나 탈세를 저질렀다는 정황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여론의 의심은 점점 확산되는 모습이다.
최근 검찰이 CJ그룹의 비자금 조성 혐의에 대한 수사를 전방위로 확대하는 가운데, 과세당국은 조세피난처에 연루된 기업과 기업인들에 대해서도 강력한 조사를 예고하고 있다.
◇ 재벌 향한 탈세 의심 부각
인터넷 언론 뉴스타파는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와 공동으로 지난 22일과 27일 두 차례에 걸쳐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기업인들의 명단을 공개했다.
1차 명단에는 이수영 OCI 회장 부부와 조중건 전 대한항공 부회장의 부인 이영학씨, 조욱래 DSDL 회장과 장남 현강씨 등 5명이 공개됐다. 이어 2차로 발표된 명단에는 최은영 한진해운홀딩스 회장과 조용민 전 대표이사, 황용득 현 한화역사 사장, 조민호 전 SK증권 대표이사 부회장과 부인 김영혜씨, 이덕규 전 대우인터내셔널 이사와 유춘식 전 대우폴란드차 사장 등이 7명이 포함됐다.
조욱래 회장의 경우 2007년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할 무렵, 480억원에 달하는 주식을 현강씨를 비롯한 세 자녀에게 편법증여한 것으로 드러나 탈세 의혹을 더욱 증폭시켰다.
2차 명단에도 굵직한 재계 인사들이 대거 포함돼 과세당국의 부담은 커질 수 밖에 없는 분위기다. 정치권도 압박에 나섰다. 새누리당 이혜훈 최고위원은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조세피난처에 유령회사를 세운 재벌 오너와 관련 인사의 범법행위를 면밀히 따져 법에 따라 엄중히 처리해야 한다"며 "관련자가 재벌총수든, 실세 정치인이든, 전직대통령이든 성역이 없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출처: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 뉴스타파]
◇ 실체 드러나는 조세피난처
그동안 베일에 싸여있던 재벌그룹들의 조세피난처 활용 방식도 서서히 실체가 드러나고 있다. 한화그룹 계열사인 한화역사의 황용득 사장은 1996년 쿡아일랜드에 '파이브 스타 아쿠 트러스트'를 설립했다. 일반적인 페이퍼컴퍼니의 구성원이 등기이사와 주주로 이뤄져 있는 것과 달리 황 사장이 설립한 것은 신탁회사다. 신탁 설정자(Settlor)와 신탁 보호자(Protector), 신탁 수익자(Beneficiary) 모두 황 사장 명의로 돼 있다.
이후 황 사장은 연결회사를 통해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의 아파트 두 채를 매입했고, 2002년 한화그룹 일본현지 법인인 한화재팬에 팔았다. 아파트 매각으로 235만달러의 수익이 발생했고, 이를 수익자인 황 사장에게 직접 보내는 방안이 논의됐다고 뉴스타파는 밝혔다. 한화그룹 측은 황 사장 개인의 일이라고 주장하다가 한화재팬의 페이퍼컴퍼니였다고 말을 바꿨다. 황 사장과 한화그룹의 석연치 않은 행보는 향후 과세당국의 타겟이 될 전망이다.
페이퍼컴퍼니의 주식 수도 제각각이다. 조민호 전 SK증권 부회장의 부인 김영혜씨가 조세피난처 페이퍼컴퍼니의 익명의 주주로부터 취득한 주식은 단 1주였다. 이덕규 대우인터내셔널 전 이사도 버진아일랜드의 페이퍼컴퍼니 '콘투어 퍼시픽'의 단독 등기이사 겸 주주로 밝혀졌는데, 서류상 발행 총 주식은 1주였다. 이 전 이사는 종합상사의 특성상 페이퍼컴퍼니를 만드는 일을 본부장(이사급) 단독으로 결정할 수 있었다고 해명했다. SK그룹과 대우인터내셔널 측도 이들의 개인적 일이었을뿐, 회사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반면 최은영 한진해운홀딩스 회장과 조용민 전 대표이사가 주주인 와이드게이트그룹의 발행 주식은 5만주였다. 실체가 없는 유령회사가 아니라 일정한 자본금을 가진 법인이었던 셈이다. 최 회장은 2006년 남편인 고 조수호 회장이 사망한 이후 2007년부터 회사 경영에 뛰어들었다.
최 회장이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한 시기는 2008년 10월이며, 이보다 9개월전인 2008년 1월 최 회장은 한진해운 회장에 취임했다. 취임한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시기에 해외 조세피난처에 90% 지분을 보유한 페이퍼컴퍼니를 세운 이유에 대해서 한진은 납득할만한 해명을 내놓지 못했다. 다만 최 회장인 2011년 11월에 이 회사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주주명부에서도 삭제됐으며 조용민 전 대표도 같은 시기에 사임했다는 입장만 밝힌 상태다.
◇ '빙산의 일각, 몸통은 따로' 의혹도
대기업들이 조세피난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하는 경우는 다반사다. 재벌닷컴에 따르면 자산 1조원 이상의 24개 그룹이 케이만 군도, 버진아일랜드, 파나마, 마셜군도 등 9개 조세피난처에 125개의 해외 법인을 설립했다.
조세피난처를 활용하더라도 적법한 절차를 밟아 정상적인 기업 활동을 한다면 문제될 것이 없다. 다만 조세피난처로 재산을 빼돌리거나 불법 외환거래를 통해 역외탈세를 저지르는 수단으로 악용되는 사례가 잦아 수사당국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최근 검찰이 CJ그룹에 대한 수사에서 조세피난처를 활용한 거액의 비자금 조성 혐의를 밝혀내고 있어 향후 수사 범위가 조세피난처에 연루된 다른 기업들에게 번질 가능성도 크다. 이미 국세청은 OCI를 비롯해 조세피난처 페이퍼컴퍼니 명단이 공개된 기업들에 대한 검증에 나선 상태다.
재계 안팎에서는 이번에 공개된 명단이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시각도 있다. 비자금 조성이 목적이라면 굳이 실명으로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하지 않고, 차명을 이용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과세당국의 한 관계자는 "대기업 총수나 유명 정치인이 조세피난처에 비자금을 만들려면 차명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며 "명단을 입수하더라도 실제 주인과 자금의 용처를 밝혀내는 일이 쉽지 않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