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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혁신]'파괴적 협력'이 시작됐다

  • 2019.05.01(수) 10:00

[창간 6주년 특별기획]
'나 홀로' 기술로 경쟁하는 시대 지났다
'글로벌 기업간·대기업-스타트업 협업' 글로벌트렌드

혁신(革新). 묵은 제도나 관습, 조직이나 방식 등을 완전히 바꾼다는 의미다. 과거 한국 기업들은 치열한 변화를 통해 성장을 이어왔고, 유례를 찾기 힘든 역사를 만들었다. 하지만 그 성장공식은 이미 한계를 보이고 있다. 성장이 아닌 생존을 고민해야 하는 처지로 몰리고 있다. 비즈니스워치가 창간 6주년을 맞아 국내외 '혁신의 현장'을 찾아 나선 이유다. 산업의 변화부터 기업 내부의 작은 움직임까지 혁신의 영감을 주는 기회들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해 새로운 해법을 만들어 내야 하는 시점. 그 시작은 '혁신의 실천'이다. [편집자]

올 1월, 세계가 놀랐다. 무려 7년간 사운을 걸고 법적 공방을 벌였던 앙숙이 갑자기 손을 잡았기 때문이다. 삼성전자와 애플 이야기다. 올해 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세계 최대 정보통신기술(ICT) 전시회 'CES 2019'는 데탕트(detente)의 무대였다.

◇ 파괴적 협력…실익 위해서라면 앙숙과도 손잡아

삼성전자는 지난 1월6일(현지시간) 라스베이거스에서 글로벌 미디어 행사를 열고 최신형 스마트TV에 애플의 '아이튠즈 무비&TV쇼'를 동시 탑재한다고 깜짝 발표했다. 장내는 술렁였다. 아이튠즈가 애플 외 타사 기기에 탑재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앙숙의 전격적인 협력에 따라 삼성전자 스마트TV 사용자는 아이튠즈 비디오 앱을 통해 아이튠즈 스토어가 보유하고 있는 4K HDR 영화를 포함해 수만편에 이르는 영화와 TV 프로그램을 대화면으로 감상할 수 있게 됐다.

스마트폰 특허와 관련 장기간 분쟁을 벌여온 양사가 손을 맞잡은건 양사의 이해 관계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애플이 13년간 글로벌TV 시장 1위를 차지한 삼성전자와 손잡으면 대형TV 스크린을 통한 자사 콘텐츠 서비스 확대를 꾀할 수 있다. 삼성전자는 스마트TV 콘텐츠 경쟁력을 더욱 강화할 수 있고 전세계 모바일 시장을 양분하는 애플 iOS 기기 이용자도 잠재적 소비자로 확보할 수 있게 됐다.

삼성전자는 이날 자사 스마트TV가 구글·아마존의 인공지능(AI) 스피커와도 연동돼 더 편리해진다고 밝혔다. 삼성도 AI 비서 '빅스비'를 서비스하고 있어 '파괴적 협력'이라 평가할 만하다. 자사 고객을 타사에 뺏길 수도 있어서다.

검색·모바일 운영체제(OS) 안드로이드로 세계 IT 플랫폼을 구축한 구글과 세계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 아마존의 글로벌시장 영향력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삼성전자의 자신감이 지나쳐서일까. 이에 대해 한종희 삼성전자 영상디스플레이사업부 사장은 기자와 만나 "소비자가 아마존과 구글의 강점 가운데 무엇을 보고 올 지 모르니 문을 연 것"이라고 설명했다.

아마존의 마케팅 능력과 구글의 인공지능 기술력을 활용하는 개방형 전략으로 경쟁력을 끌어올리겠다는 전략이다. 폐쇄적 경쟁보다는 서로의 강점을 끌어안으면서 함께 시장을 키운다는 것이다.

이같은 협력은 삼성만의 얘기가 아니다. LG전자도 애플과 손을 잡았다.

LG전자는 인공지능 플랫폼 'LG 씽큐'(LG ThinQ)을 탑재한 스마트TV를 애플의 무선 TV 스트리밍 서비스 '에어플레이'(AirPlay 2)와 스마트홈 플랫폼 '홈킷'(HomeKit)과 연동되도록 한다.

이로써 애플은 세계 1·2위 TV 제조사인 삼성과 LG를 통해 자사 콘텐츠를 전세계에 유통할 수 있게 된 셈이다.

◇ 개방형 혁신으로…'손잡고 경쟁하자'

혁신은 먼곳에 있지 않다. 기술이 어느때보다 고도화하고 국가별·기업별 수준도 격차가 크게 줄어들면서 전에 없던 완전히 새로운 것을 찾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지난 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세계 최대 모바일 전시회 MWC에서도 이같은 모습이 나타났다. 자동차 브랜드 '랜드로버'와 중장비 업체 '캐터필러', 건전지 기업 '에너자이저'도 스마트폰을 만들어 전시했다. 심하게 말하면 '아무나' 수준급의 스마트폰을 만들 수 있게 됐다는 얘기다.

이들이 공개한 것은 밟아도 되고 물이나 모래에 넣어도 되는 아웃도어용 스마트폰, 1만8000밀리암페어(mAh)의 대용량 배터리를 장착해 일주일은 쓸 수 있다는 스마트폰이었다. 전시회 관람객의 눈길을 모았지만, 혁신이라고 보기는 어렵다는 평가다.

초고속·초저지연·초연결성이 특징인 5세대 이동통신(5G)과 폴더블(접히는) 스마트폰도 마찬가지다. 소비자는 모바일인터넷 속도가 빨라지는 변화와 접히는 폰은 오래전부터 경험했다.

결국 사업자들은 제품·서비스 완성도를 기본으로 하되 다양한 사업자와 손을 잡는 방식으로 돌파구 찾기에 나서고 있다. 세계 최대 OTT(온라인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 사업자 넷플릭스도 TV의 명가 삼성전자·LG전자와 손잡고, 세계 곳곳에서 콘텐츠 사업자들과 연결고리를 맺고 있다.

대동소이한 변화 속에선 차별화한 서비스 경험을 제공하는 것이 셀링 포인트가 될 것이란 판단 때문이다.

수년 전부터 핫 트렌드가 된 인공지능 산업과 블록체인 시장도 마찬가지다.

인공지능은 인터넷 검색에 이어 소비 활동의 '퍼스트 콘택트'(First Contact·제일접촉)를 가져갈 것으로 기대되는 분야다. 소비자들이 아이 기저귀를 살 때 네이버에서 검색하는 게 아니라 인공지능에게 물어볼 것이란 얘기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현재까지 생태계가 완전히 구축되지 않은 블루오션이다.

그러니 불필요한 경쟁보다는 다양한 사업자들이 협력해 생태계를 먼저 키우면서 혁신적 서비스를 구현하려는 움직임이 대세다. 국내만 보더라도 삼성전자, SK텔레콤, KT, 네이버, 카카오 등 대표적 인공지능 기업들은 자사 인공지능 플랫폼 개발 도구를 외부에 개방하고 있다.

이같은 '오픈(개방형) 플랫폼' 전략을 가속하면서 외부 개발자들이 자사 플랫폼을 기반으로 다양한 서비스를 개발할 수 있도록 해 경쟁력을 확보하겠다는 것이다. 구글도 지난 3월 한국에서 인공지능(AI) 개발자 5만명을 교육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블록체인 시장 역시 이같은 오픈 플랫폼 전략이 구사되고 있다.

이와 함께 혁신의 요람이자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이 실험되는 스타트업(신생 벤처) 투자·협력을 통해 기회를 모색하는 움직임도 포착된다. 국내 1위 이동통신사인 SK텔레콤은 최근 사내 유망 기술사업을 독립시켜 글로벌 '유니콘'(unicorn) 기업으로 육성하는 프로그램을 가동하기로 했다.

유니콘 기업은 시가총액 10억달러(약 1조원) 이상 스타트업(신생 벤처)을 뜻한다. 스타트업 창업을 지원함으로써 혁신적인 인력을 양성하고 이들의 혁신을 모아 글로벌 시장에서 통하는 기술·서비스를 만들겠다는 목표다.

최재붕 성균관대 기계공학부 교수는 "과거의 소비는 대부분 오프라인 매장에서 이뤄졌지만, 최근에는 아마존과 같은 온라인 마켓이 커지면서 시장 생태계 자체가 급격히 바뀌고 있다"며 "이처럼 변화하는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애플과 퀄컴이 손을 잡는 등 경쟁사 간의 파괴적 협력을 포함한 다양한 혁명적 변화가 요구되는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는 이어 "고객의 선택, 새로운 소비행동이 기업의 이별과 만남을 만들고 성패까지 좌우할 것"이라며 "이제 글로벌 기업들은 스마트폰을 신체의 일부처럼 사용하는 '포노 사피엔스'가 만드는 빅데이터에 주목해야 한다"고 주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