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통업계에서 '책'의 존재감이 커지고 있다. 편의점은 유명 출판사의 책 표지를 빵에 입히고, 식품기업은 전자책 플랫폼과 손잡았다. 패션 플랫폼에서는 북커버와 책갈피 거래가 늘고 있다. 쇠퇴하는 듯했던 책이 2030세대의 새로운 트렌드인 '텍스트힙(Text Hip)'을 타고 식품과 패션, 라이프스타일 시장으로 영역을 넓히고 있다.
책갈피 받으려고 빵 먹는다
유통업계에서 최근 '텍스트힙' 확산을 가장 잘 보여주는 곳은 편의점이다. GS25는 지난달 21일 출판사 민음사의 캐릭터 IP '오늘의 귀여움'을 반영한 '민음사빵'을 선보였다. 제품에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과 시집 표지를 활용한 투명 책갈피 20종 가운데 하나가 무작위로 들어 있다. 빵과 함께 책 관련 굿즈를 수집하는 재미를 더했다.
반응은 예상보다 뜨거웠다. 민음사빵은 출시 직후 전국적인 품절 현상을 빚었다. 지난 3일까지 누적 판매량은 49만개를 기록했다. 인기 책갈피는 웃돈을 주고 구매해야 할 정도로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빵 가격은 2700~3700원이지만 책갈피는 중고거래 플랫폼에서 개당 5000~8000원에 거래된다. 인기 책갈피의 중고 거래가는 1만원을 훌쩍 넘을 정도다. 과거 포켓몬빵이 일으킨 '띠부띠부씰' 수집 열풍이 책갈피로 넘어간 셈이다.
민음사빵 책갈피 수집 열풍을 이끄는 건 2030대 여성'이었다. 실제로 GS25에 따르면 민음사빵 구매 고객 가운데 2030 여성 비중이 절반을 넘었다. 자신의 독서 취향을 굿즈 형태로 가볍게 즐기고 소장하려는 젊은 여성 소비자의 니즈가 구매를 끌어올린 것으로 분석된다.
민음사빵이 흥행하자 독서 콘텐츠와 식품을 결합하는 협업도 이어지고 있다. 연세유업은 전자책 플랫폼 kt 밀리의서재와 협업한 '연세우유 밀리의 생크림빵'을 지난 9일부터 전국 CU 매장에서 단독 판매하기 시작했다. 밀리의서재 서비스 출시 10주년을 기념한 제품이다. 카드 뒷면에는 밀리의서재 구독 혜택을 담은 QR코드를 넣었다. 빵을 구매한 소비자를 전자책 플랫폼 이용 고객으로 연결하기 위함이다.
문학이라는 장르는 외식 공간으로도 파고 들었다. 아워홈이 운영하는 뷔페 브랜드 '테이크' 종각 1호점은 영풍문고와 협업해 오는 11월 10일까지 '테이크 북클럽' 팝업테이블을 운영한다. 허먼 멜빌의 소설 '모비 딕'에 등장하는 클램차우더부터 아베 야로의 만화 '심야식당'에서 착안한 소시지 나폴리탄, 테라사와 다이스케의 만화 '미스터 초밥왕'을 모티브로 한 장어 오이 호소마끼까지 책 속 이야기를 실제 메뉴로 구현했다.
가방·텀블러 이어 '책꾸'
이런 흐름은 가방을 꾸미는 '백꾸', 텀블러를 꾸미는 '텀꾸'에 이어 책을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책꾸' 문화로 확장되고 있다.
29CM에 따르면 지난 8월 11일부터 9월 10일까지 한 달간 북 액세서리 거래액은 직전 한 달보다 57% 이상 증가했다. 같은 기간 라이프스타일 편집숍 '이구홈' 전 매장 기준 북 액세서리 거래액은 직전 동기간보다 2.7배 이상 뛰었다. 디자인과 소재가 독특한 북커버, 책갈피, 독서링 등이 대표적 인기 상품이다.
29CM가 최근 성수동에서 일본 라이프스타일 브랜드 로프트와 협업해 진행한 문구 팝업에서도 북 액세서리가 인기를 끌었다. 팝업스토어에서는 나만의 책갈피를 직접 코팅해 만드는 체험 공간이 큰 호응을 얻기도 했다.
패션 플랫폼 W컨셉에서는 지난 8월 21일부터 9월 10일까지 도서·북커버·북클립 등 독서 관련 검색량이 전년 대비 110% 증가했다. 같은 기간 관련 상품 거래액은 70% 늘었고, 독서 스탠드와 독서등 등 조명 상품 거래액도 85% 증가했다.
주요 검색어는 북커버와 책갈피, 북클립, 북밴드, 독서대, 독서등 등이었다. 최근에는 책을 읽으며 페이지와 감상을 기록하고 책갈피로도 활용하는 '북트래커'와 북커버, 북클립, 북밴드 등이 인기를 끌고 있다.
W컨셉 관계자는 "텍스트힙 열풍에 다양한 독서템이 꾸준히 인기"라며 "북커버는 야외나 대중교통 등에서 개인의 독서 취향을 보호하는 동시에 책을 감성적인 패션 소품으로 연출하려는 고객들의 수요가 크게 증가했다"고 말했다.
독서율은 줄어도 '독서템'은 뜬다
그렇다면 성인 독서율이 하락하고 있음에도 유통업계가 텍스트힙에 주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전체 독서 시장은 시들어가고 있지만, 2030 세대의 책장은 다시 달아오르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5 국민 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성인의 연간 종합독서율은 38.5%에 그쳤다. 2023년 조사보다 4.5% 떨어진 수치로, 국민 독서실태조사가 시작된 1994년 이후 가장 낮다. 성인이 1년 동안 읽거나 들은 책도 평균 2.4권에 불과했다.
하지만 젊은 세대에서는 다른 흐름이 나타났다. 20대의 연간 종합독서율은 75.3%로 2023년보다 0.8% 상승했다. 전 연령대 가운데 독서율이 오른 것은 20대가 유일했다. 30대의 독서율도 66.4%로 다른 연령층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했다.
업계에서는 '텍스트힙' 현상이 단발성 굿즈 마케팅에 그치지 않고, 2030세대의 새로운 소비 문화로 정착할 것으로 보고 있다. 종이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전통적인 독서 방식은 줄었지만 2030세대를 중심으로 책을 소비하는 방식은 다양해지고 있다. 책을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관련 상품을 구매하며 자신의 취향을 표현하는 식이다.
특히 도파민 과잉 시대에 스마트폰을 끄고 종이책을 펼치는 행위 자체가 2030세대 사이에서 차별화 '지적인 취향'을 보여주는 방식이 되고 있다. 어떤 책을 읽는지, 어떤 문장을 스크랩하는지, 어떤 감성으로 책을 꾸미는지를 SNS에 공유하는 것 자체가 하나의 콘텐츠가 됐다. 이른바 '텍스트힙'이 독서 문화를 넘어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소비로 확장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소비 체질 변화는 유통가에게도 호재다. 도서 판매만 보면 마진율이 높지 않지만, 굿즈·팝업스토어·체험 공간 결합 상품은 체류시간을 늘리고 2차, 3차 소비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책이 학습이나 독서 자체를 위한 수단이었다면, 최근 2030세대에게 책은 지적인 취향을 드러내는 패션 소품이자 라이프스타일 아이콘으로 재해석되고 있다"며 "앞으로도 굿즈, 공간 팝업, 외식 등 이종 산업 간의 협업 통한 텍스트힙 마케팅은 더욱 다양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