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이 이재용 부회장 사면에 대해 공식적으로 처음 입을 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일 4대 그룹 대표를 초청해 오찬 간담회를 개최한 자리에서다.
삼성전자 디바이스솔루션(DS) 부문장인 김기남 부회장은 이 자리에서 "총수가 있어야 의사결정이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다"고 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경제 5단체장이 건의한 것 고려해주시라"며 우회적으로 이재용 부회장 사면론에 운을 띄우자 김 부회장도 작심한듯 말을 보탠 것이다.
문 대통령이 이같은 건의를 '직접' 들은 것도 이번이 처음이다. 문 대통령은 확답을 하지는 않았지만 "고충 이해한다. 국민들도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고 답한 것으로 청와대는 전했다. "대통령이 마음대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라며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한 일로 거리를 뒀던 과거(취임 4주년 특별연설 후 질의응답)와는 다소 달라진 분위기여서 앞으로 어떤 변화가 있을지 주목된다.
한·미 대통령 격려에 '용기 낸' 삼성전자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사면론은 청와대 간담회 이후 더욱 강하게 떠오르고 있다. 한·미 양국 대통령이 삼성전자의 대규모 투자 계획에 감사의 뜻을 표하자, 그간 공식적으로 이렇다 할 의견을 내지 않았던 삼성전자도 총수 부재의 고충을 토로하고 나섰다.
소통의 장은 지난 2일 청와대 상춘재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4대그룹 오찬 간담회였다. 이날 간담회에는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과 정의선 현대자동차 회장, 최태원 SK 회장, 구광모 LG 회장이 참석했다. 한미 정상회담 기간에 이들 기업이 40조원이 넘는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한 것에 대해 문 대통령이 감사의 뜻을 전하기 위해 마련한 것이라고 청와대는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간담회 모두 발언에서 "우리 경제가 코로나 위기로부터 빠르게 회복하고 재도약하는데 4대 그룹의 역할이 컸다"며 "한미 정상회담 성과는 어느 때보다 풍부했다. 지금까지 미국과 수혜적 관계였다면 이제는 반도체, 배터리, 전기차, 바이오 등 첨단 분야에서 글로벌 공급망에 도움을 주는 동반자적 관계가 됐고, 그 과정에서 4대 그룹의 기여가 컸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에는 최태원 SK 회장과 김기남 삼성전자 부회장, 공영운 현대차 사장, 김종현 LG에너지솔루션 사장 등도 방미해 40조원이 넘는 미국 투자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관련기사: [인사이드 스토리]삼성, 20조 보따리 꺼내고도 안 푼 이유(5월25일)
특히 삼성전자가 반도체 파운드리(위탁생산) 공장 증설에 쓰겠다고 밝힌 투자 규모는 약 20조원(170억달러)으로 현대차(약 8조원), SK(7조원), LG(6조원)을 숫자로 압도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감사하다"는 말을 연발할 정도로 한미 관계 개선에 기업이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다.
"총수 부재, 신속한 의사결정 어렵다"
다만 삼성전자의 투자 계획은 이미 알려진 내용에서 크게 달라진 내용은 없는 것이었다. 170억달러 규모의 투자는 삼성전자가 미국 텍사스주 당국과 공장증설 관련 협상을 하면서 과거에 이미 내놓은 계획이기 때문이다.
김기남 부회장도 문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삼성은 오래 전부터 미국의 파운드리 공장을 검토하고 있었다"고 했다. 총수 부재에 따라 과감하고 신속한 의사결정은 어려운 상황인 점을 에둘러 강조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이날 사면론 언급은 매우 조심스러웠다. 대한상공회의소(대한상의) 회장인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최 회장은 대통령에게 "창의적 아이디어를 가진 인재가 필요하다"며 "경제5단체장이 건의한 사항을 고려해달라"고 했다. 이재용 사면론을 직접 입에 올리지 않고 앞서 대한상공회의소와 한국경영자총협회, 한국무역협회, 한국중견기업연합회, 중소기업중앙회 등 경제5단체장이 지난 4월 이재용 부회장 사면을 청와대에 건의한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
최 회장의 발언은 의미가 크다. 대기업집단 총수 사면에 대한 의견을 대통령 앞에서 꺼내는 것이 상당한 부담인 만큼, 재계 맏형으로서 역할을 하려는 의지가 보였다는 평가다.
김기남 부회장도 삼성전자 입장에선 처음으로 사면론을 공식 건의했다. 김 부회장은 "반도체는 대형투자 결정이 필요한데, 총수가 있어야 의사결정이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다"고 했다. 사면해달라고 직접적으로 요청한 것은 아니나, 이재용 부회장이 경영에 복귀해야 할 필요성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국내 반도체 투자 확대도 했는데…
더욱 흥미로운 대목은 김 부회장의 다른 언급이다. 그는 "(삼성전자가) 미국에 공장을 지어 일자리를 외국에 빼앗기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있지만, 제2의 평택공장 부지는 국내에서 찾기 때문에 일자리 창출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는 삼성전자가 지난달 13일 국내 시스템반도체 사업 육성을 위해 오는 2030년까지 38조원을 더 투자하겠다고 밝힌 점을 재차 강조한 것이다. 앞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2019년에 내놓은 '시스템반도체 비전 2030'에 담긴 133조원의 투자계획에서 규모를 키운 것이다.
삼성의 국내투자 확대는 전세계적인 반도체 공급난 속에 나왔다. 문재인 대통령까지 나서면서 우리나라를 세계 반도체 공급망을 주도하는 핵심국가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내놓자 삼성이 화답하듯 꺼낸 계획이기도 하다. 하지만 문제는 앞으로다. 파운드리만 해도 대만 TSMC의 기세에 삼성이 더 밀리는 모양새다. ▷관련기사: 더 앞서가는 TSMC…주춤하는 삼성전자(6월2일)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다른 한 총수도 "어떤 위기가 올지 모르는 불확실한 시대에 앞으로 2~3년이 중요하다"고 거들었다. 최종 의사결정권자의 부재가 길어질수록, 불확실성 시대에 적극적이면서 민첩하게 대응하기 어렵다는 점을 지적한 것으로 분석된다.
문재인 대통령은 재계 수장들의 이같은 '우회 건의'의 진의를 묻고 이재용 부회장 사면을 의미하는 것을 확인한 뒤 "고충을 이해한다"며 "국민들도 공감하는 부분이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은 경제 상황이 이전과 다르게 전개되고, 기업의 대담한 역할이 요구된다는 점도 잘 알고 있다"고 답했다. 적어도 문 대통령은 이재용 사면론 주장에 담긴 근거에는 동의한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국민 공감' 대목은 해석이 엇갈린다. 국민들이 사면을 공감한다는 말이라기에는 명확하지 않다는 설명이다. 청와대도 이와 관련 "긍정과 부정, 어떤 쪽을 공감하느냐 특정하지 않았다"며 "두루두루 의견을 경청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고 했다. 문 대통령은 취임 4주년 기자회견에서도 이 부회장 사면에 대해 긍정과 부정 등 국민 의견을 충분히 듣고 판단하겠다고 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