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그룹이 적극적으로 추진해온 SK실트론 인수가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하고 있다. SK그룹이 SK실트론 매각 필요성과 조건을 다시 검토하면서다.
업계에서는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요 확대를 계기로 SK실트론의 장기 성장성과 전략적 가치가 당초 예상보다 높아졌다는 판단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고 있다. SK그룹 내부에서 매각을 계속 추진하더라도 기존에 거론됐던 수준보다 높은 가격을 받아야 한다는 의견이 힘을 얻고 있다는 관측이다.
두산그룹 입장에서는 이 같은 상황이 달가울리 없다. AI 반도체 밸류체인에 진입하기 위해 SK실트론만 한 매물을 다시 찾기 어려워 인수 필요성이 크다. 하지만 이미 마련해야 할 재원 규모가 상당해 인수가격이 더 높아질 경우 재무건전성이 흔들릴 수 있다는 점에서 고민이 커질 전망이다.

SK실트론 매각 방향타 돌린 SK
18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SK그룹은 SK실트론 매각 계획과 거래 조건을 다시 검토하고 있다. 당초 지난달 28일 두산과 주식매매계약(SPA)을 체결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본계약 체결을 앞두고 매각 논의가 멈춰선 상태다.
SK그룹이 재검토에 들어간 배경으로는 SK실트론의 성장 잠재력이 꼽힌다. SK실트론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반도체용 실리콘(Si) 웨이퍼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기업이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비롯한 국내외 반도체 제조사에 웨이퍼를 공급하는 대표적인 반도체 소재·부품·장비 기업이기도 하다.
AI 반도체 시장이 예상보다 강한 성장세를 이어가면서 SK실트론의 주력 사업인 300㎜ 실리콘 웨이퍼 수요도 중장기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커졌다. AI 서버에는 고대역폭메모리(HBM)뿐 아니라 일반 D램과 낸드플래시, 중앙처리장치(CPU), 그래픽처리장치(GPU) 등 다양한 반도체가 대량으로 들어간다. 반도체 생산량이 늘어나면 원재료에 해당하는 웨이퍼 수요도 함께 증가할 수밖에 없다.
반도체용 웨이퍼는 장기공급계약 비중이 높아 반도체 업황 개선이 곧바로 판매가격과 실적에 반영되지는 않는다. 고객사들이 기존 재고를 먼저 소진해야 하고 계약가격이 조정되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하지만 AI 반도체 수요가 장기간 이어질 가능성이 커지면서 SK실트론 역시 시차를 두고 수혜를 볼 것이라는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SK그룹이 자산 재조정에 나선 상황에서도 SK실트론은 막바지까지 매각 여부를 고민했을 정도로 반도체 밸류체인에서 의미가 큰 회사"라며 "반도체 업황이 좋아지면서 매각을 결정했던 시점보다 높은 가치를 반영해야 한다는 의견이 SK 내부에서 나오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두산, SK실트론 몸값 상승이 떨떠름한 이유
SK가 SK실트론의 몸값을 높여야 다시 협상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오지만, 두산이 이를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SK실트론은 세계적으로도 소수 기업만 생산할 수 있는 300㎜ 반도체용 웨이퍼를 제조하는 회사다. 시장 진입장벽과 고객사 인증기간이 길고 국내 반도체 공급망에서 차지하는 전략적 가치도 크다. 하지만 현재 실적만 놓고 보면 인수가격을 크게 높여야 할 만큼 수익성이 빠르게 개선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올해 1분기 SK실트론의 연결 기준 매출은 4534억원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1.8% 감소했다. 영업이익은 88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76.7% 급감했다. 순익 기준으로 82억원 적자로 돌아섰다.
국내 Si 웨이퍼 사업은 여전히 이익을 내고 있지만 AI 반도체 붐이 매출과 수익성에 온전히 반영되지는 않고 있다. AI 수요에 힘입어 메모리용 300㎜ 웨이퍼 판매량은 늘고 있지만, 웨이퍼 판매가격 하락과 고부가 제품 판매 부진 등이 수익성을 압박하고 있어서다.
여기에 미국에서 진행 중인 실리콘카바이드(SiC) 웨이퍼 사업 적자가 국내 Si 웨이퍼 사업에서 창출한 이익을 상당 부분 갉아먹고 있는 형국이다. 전기차 시장의 성장을 기대하고 미국에 생산시설 및 인력을 확대했지만 전기차 수요 둔화의 직격탄을 맞은 영향이다.
이에 따라 두산이 SK실트론을 인수하면 Si 웨이퍼 업황 회복 속도뿐 아니라 SiC 사업의 적자 지속 가능성과 추가 투자 부담까지 함께 떠안아야 한다. AI 반도체 시장의 성장성만을 근거로 대폭 높아질 인수가격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다.
업계 한 관계자는 "AI 붐에 힘입어 SK실트론 이익이 단기간에 크게 성장할 것이라는 가정은 지나치게 긍정적일 수 있다"며 "Si 웨이퍼 사업이 개선되더라도 SiC 사업 적자가 계속될 가능성과 추가 자금 투입 부담을 충분히 반영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SK실트론 매각이 SK그룹의 자산 리밸런싱 과정에서 추진됐고 SK실트론의 차입금 자체도 3조원에 육박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SK 입장에서도 매각을 통해 재무부담을 낮출 필요가 있다"며 "다만 AI 반도체 수요가 허상이 아닌 만큼 기존보다 높은 가격을 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수 있고, 두산은 그 가격을 감당할 수 있는지를 다시 계산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두산은 얼마나 더 쓸 수 있을까
재계에서는 두산이 반도체 사업 확대에 강한 의지를 보이고 있는 만큼 SK 측이 당초 예상보다 높은 가격을 요구하더라도 일정 부분은 수용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다만 추가로 부담할 수 있는 금액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평가다.
기존에 시장에서 거론된 SK실트론 인수 관련 두산의 총 소요자금은 약 5조원이다. 지분 인수대금 3조5000억원과 기존 SK실트론 차입금을 리파이낸싱 하기 위한 자금이 포함된 규모다.
이를 위해 두산은 산업은행과 우리은행으로부터 2조5000억원가량을 인수금융 주선으로 조달하고 나머지는 보유 현금과 지분 유동화 등을 통해 조달할 것으로 전망됐다. 애초 알려진대로 두산이 SK실트론을 인수했더라도 두산은 보유한 현금성 자산을 대부분 소모하게 된다.
결국 SK가 인수가격을 높이고 이를 일부 수용한다면 앞서 자금을 조달했던 방식과 비슷하게 핵심 계열사인 두산에너빌리티나 두산로보틱스 지분을 활용하거나 인수금융을 늘리는 방안을 검토해야 한다. 다만 계열사 지분 활용은 이미 진행했던 만큼 인수금융 확대가 유력한 것으로 분석된다.
인수금융 확대 시 현재 두산의 재무 상황 등을 고려하면 용인 가능한 규모는 4000억원~5000억원 안팎이 될 거라는 분석도 있다. 이 이상이 될 경우 자칫 그룹 전체의 재무건전성이 악화할 가능성이 높다. 가격 인상을 감내한 무리한 인수가 자칫 '승자의 저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애초 시장에서 전망되는 가격에 자금 계획을 세워온 만큼 두산 입장에서는 SK실트론의 몸값이 올라가면 재무적 부담이 매우 커질 수 있다"라며 "두산이 인수를 강력하게 희망한다면 FI(재무적 투자자)를 확보하는 방안도 고민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