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력을 동력으로 사용하는 선박 도입을 둘러싼 국제 논의가 본격화하면서 조선업계에 새로운 먹거리로 부상할지 주목된다. 그동안 항만 입항과 사고 책임, 핵안보 등 복잡한 규제 문제로 상용화가 어려웠던 원자력 추진선에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규칙이 마련될 경우 글로벌 선사들의 발주 논의도 본격화할 수 있어서다.
특히 한국 조선사들은 원자력선에 대한 연구·검토 수준을 이미 넘어섰고 개념설계 등에 나선 상황이어서 글로벌 시장에서도 앞서 나가고 있다는 평가다. 원자력선에 대한 국제 질서가 마련되기 시작하면 의미 있는 수주에 성공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원자력 선박, 국제 '규칙' 도입 첫 발
2일 조선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중심으로 세계 각국 정부와 규제기관, 국제기구, 조선·해운·원전업계 등은 해상 원자력 활용을 위한 국제협력 플랫폼 'ATLAS(Atomic Technologies Licensed for Applications at Sea)'를 출범시켰다.
ATLAS는 민간 원자력 추진선이나 해상 부유식 원전 도입에 필요한 국제 규제체계를 정비하기 위해 마련됐다. 국제 안전기준과 법·규제체계, 핵물질 안전조치, 핵안보 등 해상 원자력 상용화에 필요한 폭넓은 사안을 논의한다.
원자력을 동력으로 사용하는 선박이나 바다 위 원전이 완전히 새로운 개념은 아니다. 러시아는 이미 다수의 원자력 쇄빙선을 운항하고 있으며 부유식 원전 '아카데믹 로모노소프(Akademik Lomonosov)'를 통해 실제 전력을 생산하고 있다.
문제는 국제 운항이다. 원자로를 탑재한 선박은 일반 상선과 달리 원자력 안전과 핵안보, 사고 책임, 항만 입항 등에서 국가별로 상이한 규제를 적용받는다. 일부 국가는 원자력 추진선의 영해 진입이나 항만 입항 자체를 제한하기도 한다.
러시아가 원자력선 등을 이미 운항하고 있지만 '그들만의 리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세계 각국 항만을 오가는 일반 상선에 원자력 추진체계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규칙 마련이 선행돼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근 국제사회가 원자력선에 다시 주목하는 배경에는 탄소배출 저감과 함께 높은 운항 효율을 구현할 수 있다는 기대가 있다.
원자력은 장기간 연료 보급 없이 운항할 수 있고 기존 화석연료 선박보다 연료 가격 변동에 따른 부담도 상대적으로 작다. 이에 연료 소모가 급격히 늘어나는 고속운항에서도 경제적 부담을 낮춰 선박의 운항 횟수와 화물 수송량을 늘릴 수 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운항 과정에서 탄소를 거의 배출하지 않는다는 점도 강화되는 국제 해운 탄소규제에 대응하는 데 장점으로 꼽힌다.
조선업계 한 관계자는 "원자력선은 운항에 필요한 인프라가 확연히 달라 도입 초기에는 일반 선박보다 더욱 비싸다"라면서도 "낮은 연료비와 고속운항을 통한 선박 운항 효율 증가 등을 통해 선박 한 척의 생산성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점이 이 같은 단점을 상쇄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에 '기회'인 이유
조선업계가 원자력 선박이 한국 조선업계에 또 다른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는 건 이를 생산할 수 있는 조선업 인프라를 갖춘 국가가 손에 꼽혀서다. 현재 원자력선을 보유하고 있고 운항 경험이 있는 러시아, 최근 조선업에 대한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에 나서고 있는 중국, 그리고 우리나라 정도다.
러시아는 이미 경험을 보유하고 있고 중국은 압도적인 자본을 바탕으로 기술력을 끌어올리고 있기는 하지만 국제 정세가 우리나라에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는 평가다.
원자력 추진선은 한 번 건조하면 원자로와 핵연료, 유지·보수 등에서 장기간 기술 공급자와의 관계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일반 상선보다 공급망과 국가 간 신뢰 문제가 중요하다는 의미다. 미국·유럽 등 주요 해운시장을 자유롭게 오가야 하는 글로벌 선사들이 원자력 추진선을 도입할 경우 기술력뿐 아니라 원자로 공급망과 규제 적합성, 지정학적 리스크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러시아는 서방의 경제제재로 글로벌 선사와의 거래 확대에 제약이 크다. 세계 최대 조선국인 중국 역시 향후 원자력 추진선 시장에서는 미·중 갈등에 따른 지정학적 리스크가 변수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HD현대-삼성중공업, 두각 보일까
국내 조선업계도 해상 원자력 시장 개화에 대비한 기술 확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가장 적극적인 곳은 HD현대그룹과 삼성중공업이다. 두 기업은 이미 원자력을 동력으로 사용하는 대형 상선의 개념설계를 마치고 글로벌 선급으로부터 기본승인(AiP)을 받는 등 상용화를 위한 기초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
먼저 HD현대그룹은 원자력 추진선뿐 아니라 원자로 기자재와 부유식 원전까지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다. HD한국조선해양은 지난해 2월 용융염원자로(MSR)를 적용한 1만5000TEU급 원자력 추진 컨테이너선의 개념설계에 대해 미국선급협회(ABS)로부터 AiP를 획득했다. HD현대는 이 원자력 추진 컨테이너선의 개발 완료 목표를 2030년으로 잡고 있다.
올해 들어서는 실제 선박 적용을 염두에 둔 기술 개발 범위를 더욱 넓히고 있다. 지난 3월 HD한국조선해양과 HD현대삼호는 ABS와 1만6000TEU급 컨테이너선에 적용할 원자력 연계 전기추진시스템 공동개발에 착수했다. 선박에 들어갈 전기추진시스템의 기본설계와 주요 전기 기자재의 사양·배치 등을 구체화하는 작업이다.
컨테이너선 외 선종으로도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한국원자력연구원과 HD현대중공업, HD한국조선해양, 현대글로비스, 지마린서비스가 공동 개발한 MSR 적용 자동차운반선이 영국 로이드선급(LR)의 AiP를 받았다. HD현대가 선박 개념설계와 주요 기술 검토를 맡고, 실제 자동차운반선을 운항하는 현대글로비스가 운항 환경과 운용 조건을 설계에 반영했다는 점에서 기존 개념 연구보다 한 단계 구체화됐다는 평가다.
부유식 원전도 준비하고 있다. HD한국조선해양과 HD현대중공업은 지난해 해상 또는 연안에서 전력을 생산해 항만이나 육상 등에 공급하는 부유식 SMR 발전모듈로 ABS AiP를 획득했다. 이에 따라 HD현대는 원자로 기자재 제작부터 부유식 발전설비, 원자력 추진 상선까지 해상 원자력의 전반적인 밸류체인을 동시에 공략하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삼성중공업 역시 원자력 추진선 개발에서 빠르게 성과를 내고 있다. 지난해 9월 한국원자력연구원과 공동 개발한 17만4000㎥급 MSR 추진 LNG운반선이 ABS와 라이베리아 기국의 기본승인을 받았다. 또 지난 7월에는 원자력연구원, 선박해양플랜트연구소(KRISO)와 공동 개발한 1만5000TEU급 원자력 추진 컨테이너선도 ABS의 AiP를 획득했다.
삼성중공업 역시 부유식 원전을 함께 공략할 것으로 관측된다. 삼성중공업은 지난해 12월 한국원자력연구원이 개발한 SMART100 원자로 2기를 탑재할 수 있는 'FSMR(Floating SMR)' 개념설계로 ABS AiP를 획득했고, 지난 7월 미국 원전 설계·엔지니어링 업체 사전트앤런디(Sargent & Lundy)와 특정 원자로에 종속되지 않는 '범용 FSMR 표준 플랫폼' 개발에도 착수한 바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