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기가 인공지능(AI) 인프라 확산에 따른 핵심 부품 수요 폭증에 힘입어 사상 최대 규모 수주와 역대 분기 최고 실적을 동시에 가시권에 뒀다. 글로벌 대형 정보기술(IT) 기업과의 대규모 장기공급계약(LTA) 체결로 중장기 일감을 대거 확보하면서다.
주력 제품인 적층세라믹커패시터(MLCC)와 고성능 반도체 패키지 기판(FC-BGA)의 가격 상승, 과점 체제 수혜가 본격화하면서 최근의 원화 강세 충격을 뚫고 가파른 실적 개선세를 나타내는 양상이다.
주문량, 출하 앞질러
9일 관련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기는 최근 글로벌 대형 AI 반도체 기업과 1조722억원 규모의 AI 서버용 MLCC 장기공급계약을 체결했다. 계약 기간은 2027년 1월1일부터 2027년 12월31일까지 1년간이며 고객사 정보는 비밀유지 조항에 따라 공개되지 않았다. 이번 수주 금액은 삼성전기의 지난해 연간 연결 매출의 9.5%에 달하는 규모로, 단일 MLCC 공급 계약 기준 역대 최대치다.
삼성전기는 앞서 올해 5월 1조5570억원 규모의 실리콘 커패시터 계약을 시작으로 6월 4539억원, 8월 2951억원 규모의 MLCC 공급 계약을 따냈다. 이번 계약을 포함해 올해 들어 글로벌 기업 10여 곳과 맺은 누적 장기공급계약 규모는 총 3조3200억원에 이른다.
이 같은 흐름은 단발성 거래가 주를 이루던 전자부품 수주 환경이 물량 선점을 위한 다년 장기 계약 형태로 재편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MLCC는 전기를 저장했다가 반도체 등 핵심 부품이 필요로 하는 순간에 맞춰 전류를 일정하게 공급하는 댐 역할을 하는 부품이다.
특히 AI 서버용 MLCC는 고온과 고전압 등 가혹한 가동 환경에서도 24시간 안정적으로 작동해야 해 고난도 제조 기술이 필수적이며 진입장벽이 높다. 일반 서버 대비 10배 이상 많은 양이 탑재되는 특성상 데이터센터 인프라 확장에 맞물려 수요가 급증하는 추세다.
글로벌 투자은행 골드만삭스는 AI 서버용 MLCC 시장 규모가 지난해 14억 달러(한화 약 1조9000억원)에서 2030년 58억 달러(약 7조8000억원)로 연평균 34% 성장할 것으로 내다봤다.
수요 급증에 힘입어 삼성전기의 주요 생산 라인은 높은 가동률을 유지하고 있다. 삼성전기 사업보고서와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MLCC를 담당하는 컴포넌트 부문의 연간 평균 가동률은 IT 수요 침체기였던 2023년 70%에서 2024년 81%, 2025년 93%로 상승했다. 올해 상반기에도 91%를 기록하며 높은 수준을 이어가고 있다. 정기 점검과 설비 보수 시간을 고려하면 통상 90%를 웃도는 가동률은 제조업계에서 완전 가동에 가까운 수준이다.
타이트한 수급 환경이 이어지자 삼성전기는 부산과 세종, 베트남 등 국내외 주요 생산 거점에 설비 투자를 집행해 생산능력 확대에 나섰다. 국내에서는 고부가 MLCC와 첨단 패키지 기판의 핵심 기지인 부산사업장에 투자를 집중하는 한편, 세종사업장의 AI 서버용 기판 라인을 증설하고 있다.
해외 거점인 베트남 공장 역시 조 단위 투자를 투입해 FC-BGA 생산능력을 대폭 확충하며 글로벌 공급 체계를 정비 중이다. 증권가에서는 고부가 제품 중심의 수급 불균형이 장기화함에 따라 향후 추가적인 판가 인상이 이어질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환율 뚫고 실적 레벨업?
공급 부족에 따른 판매단가 인상과 고부가 제품 비중 확대는 대외 환율 변동성까지 상쇄하며 실적 눈높이를 끌어올리고 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삼성전기의 올해 3분기 연결 기준 컨센서스(시장 평균 전망치)는 매출 3조7855억원, 영업이익 6000억원 안팎(5960억원) 수준이다. 이는 전년 동기 대비 각각 31%, 129%가량 증가한 수치다.
원/달러 환율이 전 분기 대비 10%가량 하락해 1450원 선 밑으로 내려앉는 등 통상 수출 기업의 채산성에 불리한 환경이 조성됐음에도 고부가 부품의 가격 상승과 출하 증가가 환율 충격을 완충한 것으로 예상된다.
실적 견인의 중심에는 AI 인프라용 핵심 부품이 자리 잡고 있다. 대신증권 추정치에 따르면 고성능 반도체 칩을 인쇄회로기판과 연결해 전기 신호를 주고받도록 돕는 초정밀 기판인 플립칩 볼그리드어레이(FC-BGA)의 3분기 매출은 6220억원으로 1년 만에 108.4% 급증할 것으로 예상됐다.
MLCC 부문 매출 역시 전년 동기 대비 46.7% 늘어난 1조8460억원에 이를 것으로 관측된다. 반면 스마트폰 등에 탑재되는 카메라 모듈 중심의 광학통신솔루션 사업 매출 증가율은 3.2%에 그칠 것으로 보여 성장 동력이 전통 IT 부품에서 AI 고부가 제품군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에 무게가 실린다.
시장의 공급자 우위 구조도 수익성 개선을 뒷받침하는 핵심 요인이다. 초대형 데이터센터를 구축하는 빅테크들이 자체 AI 반도체 개발까지 확대하며 부품 수요를 키우고 있지만 고부가 제품을 생산할 수 있는 제조사는 FC-BGA의 경우 일본 이비덴과 삼성전기, MLCC의 경우 일본 무라타와 삼성전기 등 각각 두 곳 안팎에 불과하다. 단기간에 신규 진입자가 나오기 어려운 과점 시장인 만큼 출하량 증가와 판가 인상, 고수익 제품 비중 확대가 동시에 맞물리고 있다.
박강호 대신증권 연구원은 "3분기 들어 원/달러 환율이 하락한 점을 반영하더라도 실적 전망치가 상향된 것은 AI 부품인 FC-BGA와 MLCC의 공급 부족이 심화됐기 때문"이라며 "FC-BGA는 AI 반도체 수요 증가와 공급 한계로 가격 인상 및 장기 공급계약 비중이 늘고 있고 MLCC 역시 데이터센터를 중심으로 평균공급단가(ASP) 상승과 높은 가동률 상황을 고려하면 가격 인상 가능성이 이전보다 높아졌다"고 진단했다.
이어 "FC-BGA와 MLCC 모두 전체 생산능력이 풀가동 상태인 동시에 동종 업계 내에서도 공급 한계를 보이고 있다"며 "고부가 매출 비중 증가에 따른 믹스 효과가 확대되면서 분기 기준 역대 최고 실적 경신 흐름이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