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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스토리]전력망도, 美공장도 네 돈…'투자 블랙홀' 빠진 삼전·닉스

  • 2026.09.10(목) 06:50

한전, 삼성 20조·SK 5조 전기료 선납 제안
美, 관세 면제 조건으로 현지 생산 확대 압박
"국내 팹 투자 밀릴 수도"…정부 대응 시험대

/생성형 AI로 제작한 이미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이중 청구서'가 날아들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반도체 클러스터 전력망 구축을 위해 향후 5년치 전기요금 약 25조원을 미리 내라는 요구가 나왔고 미국은 반도체 관세를 앞세워 현지 생산 확대를 압박하고 있는데요.

문제는 기업이 떠안아야 할 몫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안에서는 국가가 책임져야 할 전력 인프라 재원까지 먼저 대야 하고, 밖에선 한미가 이미 합의한 3500억달러 규모 대미 투자와 별개로 신규 팹 건설 부담까지 추가될 수 있습니다. 기술 개발과 생산설비 투자만으로도 막대한 자금이 필요한 상황에서 국내외 요구가 동시에 불어나며 기업의 투자 재원이 양쪽으로 빨려 들어가는 형국입니다. 인프라 구축부터 통상 대응까지 기업 몫으로 얹히는 '투자 블랙홀'에 빠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입니다.

빚더미 한전, '선납' 승부수?

10일 업계에 따르면, 한국전력공사(이하 한전)는 최근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대규모 전기요금 선납제를 제안해 참여 여부와 조건을 협의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납부액을 기준으로 삼성전자 20조원, SK하이닉스 5조원 안팎이 거론됩니다. 두 회사가 앞으로 5년간 낼 전기요금을 미리 당겨 받겠다는 구상입니다.

현재 검토되는 방식은 선납금을 약 1년에 걸쳐 받고 이후 매달 발생하는 전기요금을 잔액에서 차감하는 구조입니다. 남은 금액에는 일정 수준의 이자를 지급하는 방안도 논의되고 있고요. 다만 참여 여부와 이자율, 선납 규모·기간 등 세부 조건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한전이 미래 전기요금까지 끌어다 쓰려는 배경에는 빠듯한 재무 사정이 있습니다. 반도체와 AI 데이터센터 확대로 전력망 투자 수요는 급증하고 있지만 한전과 발전자회사의 연결 부채는 지난 6월 말 기준 210조7000억원에 달합니다. 차입금만 133조3000억원이고 올해 상반기에 지급한 이자도 2조1000억원입니다. 기존처럼 한전채 발행에만 기대 막대한 송·변전망 투자를 감당하기 어려워지자 새로운 자금줄을 찾고 있는 셈입니다.

돈 들어갈 곳은 갈수록 늘고 있습니다. 한전은 선납금을 확보하면 용인과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등에 전력을 공급하는 송·변전망 건설에 우선 투입할 계획입니다. 제11차 장기 송·변전설비계획상 2038년까지 필요한 전력망 투자비만 72조8000억원입니다. 반도체 메가클러스터와 AI 데이터센터가 본격 가동되면 필요한 재원은 더 불어날 수 있습니다.

기업도 마냥 외면하기 어렵습니다. 수십조원을 들여 첨단 팹을 지어도 송전선과 변전소가 제때 들어오지 않으면 공장을 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낼 전기요금을 먼저 내는 대신 전력망 건설을 앞당길 수 있다면 기업에도 실익이 있다는 게 한전의 논리입니다.

그러나 한전의 재무 한계를 메우기 위해 국가 핵심 산업 인프라 구축 재원까지 특정 기업이 먼저 대는 구조가 적절하느냐는 논란은 남습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전기요금을 선납받아 전력망 확충을 앞당긴다는 점에서는 의미가 있지만 기업이 앞으로 낼 요금을 먼저 내고 사실상 전력망 건설비까지 부담하는 구조가 장기적으로 지속 가능한지는 신중하게 봐야 한다"며 "전력망은 특정 기업을 위한 시설이 아닌 만큼 기본적으로 정부와 한전이 책임지고 재원을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3500억달러에 '+α' 붙을까

국내에서 전력망 비용까지 떠안을 가능성이 커진 사이 미국에선 현지 생산 확대 압박이 거세지고 있습니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지난 2일 주요 20개국(G20) 혁신장관회의에서 미국 내 생산 여부와 반도체 관세 혜택을 연계하는 방안을 준비하고 있다고 밝혔는데요. "미국에서 생산하면 관세를 내지 않지만 그렇지 않다면 세계 최대 시장에 진입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게 러트닉 장관의 설명입니다.

사실상 관세를 지렛대로 미국 내 생산을 더 늘리라는 요구입니다. 실제 고율 관세를 부과하기보다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추가 투자를 끌어내기 위한 협상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도 나옵니다. 반도체 가격이 이미 오른 상황에서 관세까지 더해지면 그 부담이 미국 기업과 소비자에게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관건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이미 진행 중인 미국 투자만으로 관세 면제 요건을 충족할 수 있느냐입니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오스틴에 파운드리 생산시설을 두고 테일러에도 첨단 로직 공장을 짓고 있습니다.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 웨스트라피엣에 약 40억달러를 투자해 HBM 첨단 패키징 생산기지와 연구개발 시설을 구축하고 있죠.

다만 두 회사 모두 미국에서 D램·낸드 등 메모리 전공정 공장을 운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삼성전자의 미국 전공정 투자는 파운드리 중심, SK하이닉스의 인디애나 투자는 HBM 후공정입니다. 미국이 '한국서 생산해 수출하는 메모리까지 관세 혜택을 받으려면 미국에서 직접 생산해야 한다'는 식으로 기준을 세울 경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모두 별도의 메모리 팹 투자를 압박받을 수 있습니다.

한미 무역합의 주요 내용./그래픽=비즈워치

더 큰 부담은 이러한 추가 투자가 한미가 앞서 합의한 3500억달러 규모 대미 투자와 별개로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입니다. 한국은 지난해 미국과 2000억달러 규모 전략투자와 1500억달러 규모 조선협력을 합쳐 총 3500억달러 투자에 합의했습니다. 일본의 5500억달러보다 2000억달러 적은 규모입니다.

정부는 당시 한국의 경제 규모와 외환시장 부담을 고려해 투자 총액을 낮추고 전략투자의 연간 자금조달 한도도 200억달러로 묶었습니다. 투자 규모와 집행 속도를 동시에 관리해 대규모 달러 유출 충격을 줄이겠다는 취지였죠.

하지만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미국 직접투자는 이 3500억달러 바깥에 있습니다. 미국이 관세를 앞세워 추가 증설을 끌어내면 정부 간 합의액은 그대로여도 한국 경제 전체가 미국에 투입하는 자금은 '3500억달러+α'로 불어납니다. 일본보다 부담을 낮춰 잡았던 당초 협상 효과가 기업의 별도 투자로 희석될 수 있는 셈입니다.

전력망도 통상도 결국 정부 몫

일본·대만과 비교하면 한국이 처한 구조는 더 불리합니다. 일본은 5500억달러라는 투자 패키지 안에서 에너지·원전 사업을 확정하고 AI·반도체 후속 프로젝트를 협의하고 있습니다. 대만은 아예 반도체·기술기업의 미국 직접투자를 무역협상 패키지에 포함시켰고요. TSMC를 비롯한 기업 투자도 대미 투자 약속 안에 들어가는 구조입니다.

반면 한국은 3500억달러를 이미 약속한 상태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추가 반도체 투자가 별도 청구서로 붙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현지 생산 요구가 메모리 전공정 팹으로까지 번지면 수십조원 규모의 자금이 추가로 미국에 투입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국내 투자 계획과도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정부는 용인과 호남 등을 중심으로 대규모 반도체 생산거점을 조성하는 '3대 메가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습니다. 특히 호남에는 팹 4기를 지어 새로운 반도체 생산축을 만들겠다는 구상입니다. 국내에서는 전력망 구축을 위해 기업 자금을 미리 끌어오고, 미국에서는 관세를 피하기 위해 신규 공장까지 더 지어야 한다면 결국 같은 기업의 투자 재원을 놓고 한국과 미국이 경쟁하는 구도가 될 수 있습니다.

삼성 및 SK 메가프로젝트 총 투자 규모./그래픽=비즈워치

통상 전문가들은 미국의 반도체 투자 압박을 단일 현안으로 봐선 안 된다고 지적합니다. 한국이 이미 약속한 3500억달러 규모 대미 투자의 집행이 늦어지고 호르무즈 해협 기여 등 다른 현안에서도 결정을 미루는 사이 미국이 통상·안보 전반으로 압박 범위를 넓히고 있다는 겁니다.

특히 일본이 대미 투자 이행에 일찌감치 속도를 낸 것과 달리 한국은 전략투자 집행이 상대적으로 더뎠다는 점이 약점으로 꼽힙니다. 미국 입장에서는 기존 합의의 조속한 이행을 요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반도체와 안보 현안에서도 추가 요구를 꺼내들 여지가 커진 셈입니다. 3500억달러라는 기존 틀을 다시 뜯어고치기보다 개별 현안마다 부담을 하나씩 얹으며 사실상 '추가 청구서'를 늘리고 있다는 해석입니다.

이럴수록 정부가 사안별로 선을 분명히 그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미 약속한 전략투자는 속도를 내 한미 간 신뢰를 확보하되 수십조원이 걸린 반도체 증설까지 미국의 요구에 떠밀려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반도체 투자는 향후 수요·수익성·국내 생산전략까지 따져 기업이 판단해야 할 영역입니다. 미국의 의중을 앞질러 먼저 투자 보따리를 키우기보다 기존 투자와 예정된 사업을 협상 과정에서 최대한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대규모 반도체 투자는 수요 전망과 수익성을 따져 개별 기업이 판단해야 할 사안"이라며 "정부도 미국의 일방적인 요구를 모두 받아들이기보다 사안별로 원칙을 세워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AI 시대 반도체 경쟁은 기업의 기술력만으로 승부가 나지 않습니다. 전력망·용수 같은 산업 인프라부터 세제·통상·외교 협상까지 국가 역량이 기업 경쟁력을 좌우합니다. 국내외 투자 압박이 동시에 커지는 상황에서 정부가 해야 할 몫까지 기업에 넘긴다면 국내 반도체 투자 기반은 약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김대종 교수는 "정부가 해야 할 일은 기업에 비용을 떠넘기는 것이 아니라 전력망·용수·인허가 등 산업 인프라를 선제적으로 구축하고 통상 협상에서 우리 기업이 불리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라며 "기업은 기술 개발과 생산시설 투자에 집중하고 정부는 전력·인프라·세제·통상이라는 국가적 기반을 책임지는 역할 분담이 필요하다"고 제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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