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석유화학 산업의 사업재편 첫 결실인 대산 1호 합병법인이 최근 공식 출범했습니다. 중국발 공급 과잉에 따른 장기 불황 속에서 오랜 진통 끝에 나온 첫 결과물이지만 이 흐름이 다른 석유화학 산업단지로 빠르게 이어지기는 쉽지 않은 분위기입니다. 각 산단이 마주한 규제와 설비 환경이 제각각인 탓에 후속 통합 논의가 곳곳에서 멈춰 서 있어서인데요.
산단별로 처한 환경과 셈법이 전혀 다르다 보니 한쪽에서 설비를 줄여도 다른 쪽에선 공급이 늘어나는 엇박자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대산과 여수가 뼈를 깎는 설비 감축에 나선 사이 울산에서는 샤힌 프로젝트를 통한 대규모 신규 물량이 쏟아져 나올 채비를 하고 있죠. 여기에 정부 감축 목표를 채울 핵심 열쇠인 여수 2호마저 지주회사 규제에 묶여 겉돌고 있는데요. 첫 단추는 꿰었지만 국내 석유화학 재편이 본궤도에 오르기까지는 갈 길이 멀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가동률 100% 승부수
14일 석유화학업계에 따르면 HD현대케미칼과 롯데대산석화의 합병법인인 H&L 어드밴스드는 이달 4일 충남 서산 대산공장에서 공식 출범식을 열고 본격적인 운영에 들어갔습니다. 새 사명은 HD현대케미칼(H)과 롯데케미칼(L)의 영문 앞 글자에 지속가능한 성장을 뜻하는 어드밴스드(Advanced)를 더했습니다.
이번 결합의 핵심은 생산 설비 압축과 가동 집중입니다. 대산 산단 내 에틸렌 생산 능력 195만톤 가운데 롯데대산석화의 노후 나프타분해설비(NCC) 110만톤 가동을 멈췄습니다. NCC는 원유를 정제할 때 나오는 나프타를 고온으로 분해해 석유화학의 기초 원료인 에틸렌 등을 생산하는 시설입니다.
양사는 110만톤 설비를 세우는 대신 남은 생산 물량을 HD현대케미칼의 85만톤 고효율 설비로 몰아줬습니다. 중국발 증설로 공장 가동률이 70~80%대로 떨어지며 고정비 부담이 커지자 가동률을 100%로 끌어올려 단위당 제조 원가를 낮추겠다는 계산입니다.
원료 공급망도 정유 공정과 하나로 엮었습니다. 인접한 HD현대오일뱅크 정유 공장에서 나프타를 파이프라인으로 직접 들여오는 수직계열화 방식을 적용했습니다. 원료를 배나 차량으로 실어 나르지 않고 관을 통해 실시간으로 조달하면서 운송비와 보관비를 아낄 수 있게 됐습니다. H&L 어드밴스드는 이러한 생산 효율화를 발판 삼아 중장기적으로 스페셜티(고부가가치) 소재와 친환경 제품 중심으로 사업 포트폴리오를 고도화할 계획입니다.
110만톤 설비를 세우면서 발생한 유휴 인력 재배치는 풀어야 할 과제입니다. 양사는 인위적 구조조정 없이 통합법인 전환 배치와 신사업 투입을 통해 고용을 유지한다는 방침을 세웠으나 부서 이동과 근무 조건 조율을 둘러싸고 노조와의 세부 협의 과정에서 진통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입니다.
규제 묶이고 증설 치이고
대산 1호 출범에 이어 여수 산단의 여수 1호 프로젝트도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여천NCC, 롯데케미칼, 한화솔루션, DL케미칼 등 4개 사는 지난 7월 8000억원 규모의 자구책을 마련해 정부 승인을 받았는데요. 한화솔루션과 DL케미칼이 지분을 절반씩 보유한 여천NCC 1~3호기 중 이미 멈춰 선 3호기에 이어 2호기를 추가로 중단하고 남은 1호기를 롯데케미칼 여수 공장과 합쳐 신설 통합법인을 세우는 방식입니다.
신설법인 지분은 롯데케미칼, 한화솔루션, DL케미칼이 3분의 1씩 나눠 갖습니다. 이를 통해 감축되는 에틸렌 생산량은 총 139만톤으로 여천NCC 생산량은 기존 229만톤에서 90만톤으로 줄어듭니다. 정부도 금융·세제·연구개발(R&D) 등에 7000억원 이상을 투입해 4사는 연내 최종안을 확정해 내년부터 사업재편을 시행할 계획입니다.
대산(110만톤)과 여수 1호(139만톤)를 합치면 멈춰 서는 설비만 총 249만톤에 달합니다. 그러나 이는 정부가 제시한 국내 전체 감축 목표치(270만~370만톤)의 하한선에 미치지 못합니다. 목표 달성을 위해서는 대규모 설비를 추가로 덜어낼 카드가 절실한 상황인데요.
LG화학과 GS칼텍스가 맞물린 여수 2호는 이 빈자리를 메울 핵심 열쇠로 꼽힙니다. LG화학은 여수에서 약 200만톤(1공장 120만톤, 2공장 80만톤), 대산에서 약 130만톤 등 국내 전체로 약 330만톤의 에틸렌 생산능력을 보유한 최대 사업자입니다. 업계에서는 LG화학 여수 2공장(약 80만톤)이 추가 재편될 경우 국내 감축 규모가 329만톤까지 늘어나 정부 목표 범위에 안착할 것으로 봅니다.
문제는 양사의 협의가 공장 밖 공정거래법 규제에 가로막혀 있다는 점인데요. GS칼텍스는 지주회사 체제상 GS의 손자회사에 해당합니다. 현행 공정거래법상 손자회사는 국내 계열회사 지분을 원칙적으로 보유할 수 없고 증손회사를 둘 경우 발행주식 전부(100%)를 소유해야 합니다. GS칼텍스가 LG화학과 50%씩 출자해 합작법인을 세우는 구조는 현행 법령과 직접 충돌합니다.
이동욱 IBK투자증권 연구원은 "여수 2호는 어느 설비를 멈출 것인가 못지않게 누가 어떤 방식으로 통합 자산을 보유할 것인가를 먼저 풀어야 하는 사업재편"이라며 "여수 2호가 풀리는 순간 국내 구조조정은 계획에서 실제 공급능력 축소로 넘어가게 되며 그 시점 역시 제품 가격 반등보다 거래구조의 제약을 언제 풀어내느냐에 더 크게 좌우될 수 있다"고 짚었습니다.
울산 산단의 상황은 한층 더 복잡합니다. 에쓰오일이 9조2580억원을 들인 '샤힌 프로젝트'가 하반기 시운전을 거쳐 내년부터 상업 가동에 들어가기 때문인데요. 가동이 본격화되면 연간 에틸렌 180만톤, 프로필렌 75만톤, 폴리머 120만톤이 시장에 새로 공급됩니다. 에틸렌 180만톤은 정부 전체 감축 목표의 절반에 맞먹는 규모입니다. 대산과 여수가 뼈를 깎아 줄인 249만톤 중 70% 이상을 샤힌 프로젝트 혼자 채워 넣는 구조입니다.
반면 울산의 기존 공급사인 SK지오센트릭과 대한유화는 자사 설비 가동 중단에 난색을 보이며 1년 가까이 재편 논의를 진척시키지 못하고 있습니다.
정부는 구조 개편에 무임승차 기업에는 단호히 대응하겠다며 석화 재편 속도전을 강조해 왔지만 논의가 멈춰 선 산단에 별다른 제재 수단을 내놓지 못하면서 형평성 논란도 불거집니다. 선제적으로 설비를 줄인 대산·여수와 달리 울산이 버티기에 들어가면서 먼저 덜어낸 곳만 손해라는 목소리도 나오는데요. 한 업계 관계자는 "각 사의 이해관계가 얽혀 논의가 지연되고 있지만 사업재편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특정 산단의 일방적 희생이 아닌 업계 전반의 균형 있는 참여가 전제돼야 한다"고 짚었습니다.
법적 규제에 묶인 거래구조와 신규 설비 증설, 여기에 산단 간 눈치싸움까지 겹친 상황에서 정부와 업계가 이 얽힌 매듭을 풀고 재편을 완주할 수 있을지 주목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