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국제 구리 가격이 연일 역대 최고치를 경신하고 있습니다. 통상 원자재가 비쌀 땐 가격 하락 위험 탓에 재고 축적을 꺼리기 마련이지만 대한전선은 오히려 49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해 전액 구리 매입에 쏟아붓기로 했습니다. 대개 차환으로 쓰이는 공모채를 원자재 구매에만 배정한 데다 시세가 가장 비싼 시점에 빚을 내 곳간을 채우는 이례적인 행보인데요.
그 이면에는 4조원대로 불어난 수주 일감을 제때 소화하고 해저 턴키 사업자로 체급을 키우려는 셈법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단기 부담을 감수한 이번 결정의 배경과 노림수를 짚어봤습니다.
곳간 찼는데 마르는 통장?…4조 일감 역설
지난 16일 대한전선은 전날(15일) 실시한 기관투자자 대상 수요예측 결과를 반영해 회사채 발행 규모를 당초 400억원에서 490억원으로 증액해 발행조건을 확정했다고 공시했습니다. 자금 전액은 올해 4분기 LS MnM 등에서 전선 제조용 구리를 사들이는 데 투입됩니다.
원자재 매입 시점으로는 상당히 부담스러운 시기입니다. 런던금속거래소(LME) 구리 3개월물 가격은 최근 장중 톤당 1만4858달러(한화 약 2000만원)까지 치솟으며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습니다. 1년 전과 비교하면 약 47% 뛴 수준입니다.
최고점에도 원자재를 서둘러 비축하는 배경은 납기 사수인데요. 글로벌 전력망 프로젝트는 납기가 지연될 경우 막대한 지체상금이 발생하고 향후 공공 입찰 참여 자격도 제한됩니다.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 등 굵직한 국책 사업 참여를 겨냥하는 대한전선 입장에서는 단기 매입 부담을 감수하더라도 납기 신뢰도를 지키는 게 우선이라는 판단입니다.
늘어난 일감 규모도 선제 매입을 압박하는 요인입니다. 대한전선의 올해 6월 말 기준 수주잔고는 4조629억원으로 처음 4조원 벽을 넘어섰습니다. 싱가포르 전력청의 400kV 초고압망과 미국 노후 전력망 교체 물량 등 굵직한 프로젝트가 줄을 이은 결과입니다. 일감이 쌓이며 실적도 뛰었습니다. 올해 들어 올린 누적 매출은 2조2820억원, 영업이익은 1213억원으로, 반년 만에 지난해 전체 영업이익(1286억원)의 94%를 벌어들였습니다.
문제는 전선업 특유의 자금 시차인데요. 구리 대금은 구매 시점에 현금으로 먼저 지급해야 하지만 케이블을 생산·납품해 정산받기까지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1년 이상 걸립니다. 4조원대 일감을 소화하기 위해 원자재 매입을 늘릴수록 단기 운전자본(영업 활동에 묶이는 자금) 부담이 가중되는 구조입니다.
실제 일감 확대와 구릿값 상승이 맞물리며 대한전선의 연결 재고자산은 지난해 말 8563억원에서 올해 6월 말 1조1400억원으로 급증했습니다. 상반기 영업활동현금흐름 역시 3179억원 순유출을 기록했습니다. 장부상 대규모 흑자에도 불구하고 원자재 결제와 재고 축적에 돈이 묶이자 공모채를 발행해 단기 유동성을 보강한 셈입니다.
공장 짓고 배 띄우고…빅게임 정조준
원자재 선제 확보로 납기 위험을 낮춘 대한전선의 다음 시선은 고부가가치 해저케이블 턴키(일괄 수행) 역량 다지기로 향합니다. 단순 케이블 제조·납품에 그치지 않고 포설과 시공까지 아우르는 실행력을 갖춰야 향후 조 단위 대형 프로젝트의 주계약자로 올라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턴키 체제 구축을 위한 선결 과제는 대규모 해저 생산 능력 확보입니다. 회사는 충남 당진 해저케이블 1공장에 이어 640kV급 초고압직류송전(HVDC) 해저케이블을 생산할 2공장 1단계 건설에 4972억원을 투입하고 있습니다. 2027년 완공이 목표입니다. 설비 투자에는 2024년 유상증자로 확보한 장기 자금(4625억원)을 투입하고 원자재 구매 등 일상 운영비는 회사채로 조달하는 자금 분리 운용 전략을 취하고 있습니다.
케이블을 바다 밑에 까는 시공 인프라 구축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지난해 해저 시공 전문업체 대한오션웍스를 인수한 데 이어 기존 6200톤급 '팔로스'호와 함께 1만1000톤급 대형 포설선(CLV) '스칸디 커넥터'호를 확보했습니다. 수심이 얕고 조류가 거센 서해안에서도 작업할 수 있는 비칭(Beaching·선체를 해변이나 얕은 바닥에 닿게 하는 방식) 설비를 갖춰 국내 유일의 투트랙 선대를 완성했습니다.
여기에 해양 로봇 전문 기업 팬스타로보틱스와 손잡고 전량 외산에 의존하던 해저 매설 원격조종 수중로봇(ROV) 국산화에도 착수했습니다. 이미 한국전력공사의 1463억원 규모 500kV HVDC 동해안~동서울 건설공사(EP2)를 턴키로 따내며 실전 레퍼런스도 다져둔 상태입니다.
구축된 인프라는 내년부터 열릴 국내외 대형 전력망 프로젝트를 정조준하고 있습니다. 미국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FERC)가 발전소와 송전망을 직접 잇는 전력 공급 시스템(FTM)의 계통 대기열 심사 규정을 개편하면서 통상 5년 넘게 걸리던 인허가 기간이 1~2년으로 줄어들어 2027년부터 북미 송전망 발주가 본격화할 전망입니다. 국내 역시 서해안 에너지 고속도로 구축과 해상풍력 확대가 맞물리며 초고압 해저케이블과 특수 포설선 확보 여부가 공급망 병목을 가를 핵심 승부처로 꼽힙니다.
유재선 하나증권 연구원은 "해상풍력 설비용량 공급 과정에서 설치선과 케이블 포설선이 주요 병목으로 작동할 수 있다"며 "선제적으로 확대한 턴키 시공 능력이 향후 개화될 국내 해저 HVDC 및 케이블 시장에서 주도적 역량을 발휘할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