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공지능(AI)발 메모리 슈퍼사이클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실적을 가파르게 끌어올리고 있다. AI 데이터센터 투자가 확대되면서 고대역폭메모리(HBM)는 물론 범용 D램까지 수급이 빠듯해졌다. 두 회사는 내년에도 수요가 공급을 웃돌 것으로 보고 증산 시계를 앞당기고 있다.
호황 속 HBM 시장의 경쟁 구도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SK하이닉스를 뒤쫓던 삼성전자가 6세대 HBM인 HBM4의 수율을 끌어올리며 공급을 빠르게 늘리고 있어서다. 점유율 격차가 좁혀지면서 증권가에서는 삼성전자가 내년 HBM 시장 1위를 탈환할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삼성전자의 추격이 거세지면서 SK하이닉스가 선두 업체로 누려온 높은 수익성과 공급자 우위가 얼마나 유지될지도 관심사다.
수율 잡고 물량 2배로…삼성 HBM4 맹추격
실적 눈높이는 이미 크게 높아졌다. 증권가가 예상하는 삼성전자의 3분기 영업이익은 석 달 전보다 10조원 이상, SK하이닉스는 3조원 넘게 상향됐다. 예상보다 강한 AI 메모리 수요가 이어지는 가운데 HBM4 판매 확대와 수율 개선이 맞물린 결과다.
두 회사는 내년 HBM 생산능력을 당초 계획보다 늘리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반도체 생산시설은 투자에서 양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리는 만큼 지금의 투자가 향후 공급 능력을 좌우한다. AI 가속기 업체와 빅테크들도 내년에 필요한 물량을 선점하기 위한 협상에 들어갔다.
특히 삼성전자의 움직임이 빠르다. 내년 HBM4와 차세대 HBM4E 생산량을 올해의 2배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HBM용 웨이퍼 투입량은 올해 월 18만장에서 내년 25만장으로 약 40% 늘리고 이 가운데 HBM4 계열 비중도 40%에서 80%까지 높인다는 방침이다.
증산의 관건은 수율이다. 삼성전자의 HBM4 양산 초기 수율은 60%를 밑돌았지만 최근 80% 안팎까지 올라온 것으로 전해졌다. 여러 장의 D램을 쌓는 HBM은 칩 하나에 문제가 생겨도 완제품 전체가 불량이 될 수 있다. 수율이 높아질수록 같은 설비와 웨이퍼로 더 많은 제품을 출하할 수 있어 수익성도 함께 높아진다.
생산 확대 움직임은 전후방 공정에서도 나타난다. HBM 생산에 쓰이는 글라스 캐리어 외주 세정 물량은 올해 월 2만장에서 내년 5만장으로 2.5배 늘어날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4나노 파운드리 생산능력 가운데 월 1만5000장가량을 HBM4용 베이스다이에 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평택 5라인(P5)의 공사 기간을 단축하는 방안도 검토되고 있다.
HBM4는 삼성전자에 단순 신제품 이상의 의미가 있다. HBM3E까지 SK하이닉스에 주도권을 내줬던 삼성전자는 HBM4에서 메모리·파운드리·첨단 패키징을 모두 보유한 사업 구조를 활용하고 있다. 10나노급 6세대(1c) D램부터 4나노 베이스다이, 패키징까지 내부에서 연계해 공정을 최적화할 수 있다는 게 강점이다.
이 같은 변화는 점유율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카운터포인트리서치에 따르면 매출 기준 삼성전자의 HBM 점유율은 올해 1분기 21%에서 2분기 33%로 뛰었다. 같은 기간 SK하이닉스는 58%에서 50%로 낮아졌다. 양사의 격차는 한 분기 만에 37%포인트(p)에서 17%p로 절반 이상 줄었다.
증권가 일각선 "삼성전자가 내년 HBM 시장에서 점유율 1위를 탈환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기 시작했다. HBM4 공급 확대에 더해 1c D램 수율 개선으로 원가 경쟁력이 높아지고 고객사 다변화와 판가 상승까지 맞물리면서 판매량과 수익성이 함께 개선될 것이란 분석이다.
증산 속도전에도 공급 부족…HBM 몸값 더 뛴다
SK하이닉스는 HBM 시장을 일찌감치 선점해 고객사와의 가격 협상에서 강한 우위를 누려왔다. 그러나 삼성전자의 HBM4 공급이 빠르게 늘면 이 같은 '공급자 프리미엄'도 낮아질 수 있다. 일부 증권사는 내년 SK하이닉스의 HBM 영업이익률 전망치를 기존 80%에서 60%로 낮췄다.
SK하이닉스도 생산능력 확충에 나섰다. 청주 M15X를 중심으로 월 1만장 수준이던 웨이퍼 투입량을 향후 8만장까지 끌어올릴 계획이다.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의 첫 번째 팹 역시 준공을 앞당겨 내년 가동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양사의 생산 확대가 본격화하면서 관심은 '가격'으로 옮겨가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지난 7월 실적발표회에서 주요 고객사와 내년 공급 물량과 가격을 협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난해에도 이듬해 계약을 10월께 마무리한 만큼 올해 역시 다음 달 3분기 실적발표회 전후로 윤곽이 드러날 가능성이 있다. 삼성전자의 공급 확대가 HBM 가격과 SK하이닉스의 협상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를 가늠할 첫 시험대다.
다만 공급 과잉 우려는 아직 크지 않다. 늘어나는 물량보다 AI용 메모리 수요가 더 빠르게 불어나고 있어서다. 삼성전자는 이미 수요 대비 공급 충족률이 역대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고 내년 부족분이 더 커질 것으로 보고 있다. 시장도 내년 HBM 수요 증가율을 56%로 예상, 공급 증가율(50%)을 웃돌 것으로 본다. 수급이 빠듯한 만큼 HBM4 가격도 올해보다 65%가량 높아질 것이란 관측이다.
실제 AI 칩 업체들은 출하량과 HBM 탑재량을 동시에 늘리고 있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최근 내년 칩 판매량을 올해의 2배 수준으로 늘리겠다고 밝혔다. 차세대 AI 가속기 '루빈 울트라'에는 패키지당 HBM4E 16개가 탑재될 예정이다. AI 가속기 판매량이 늘어나는 동시에 칩당 HBM 탑재량도 증가하면서 HBM 수요가 빠르게 불어나는 구조다.
AMD도 데이터센터 시장 공략에 속도를 내고 있다. 리사 수 AMD CEO는 내년까지 데이터센터 매출을 2배로 늘리겠다고 언급했다. AI 훈련·추론용 GPU에 이어 AI 에이전트 확산으로 CPU 수요까지 늘면서 데이터센터용 반도체 시장도 덩달아 커지는 모양새다.
단기간에 HBM을 대신할 기술도 마땅치 않다. 최근 미국에서 열린 'AI 인프라 서밋'에서는 차세대 메모리 연결 규격인 CXL(컴퓨트익스프레스링크)이 HBM의 대안이 되기 어렵다는 의견이 잇따랐다. CXL은 여러 메모리를 연결해 용량을 늘리거나 공유하는 기술이다. HBM 부족을 덜어줄 수는 있지만 빠른 데이터 처리가 필요한 AI 연산에서는 HBM을 대체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HBM 부족은 범용 메모리 가격까지 밀어 올리고 있다. 업체들이 한정된 생산능력을 HBM과 서버용 제품에 우선 배정하면서 PC와 스마트폰 등에 쓰이는 D램 공급까지 빠듯해졌다. 트렌드포스는 3분기 범용 D램 고정거래가격이 전 분기보다 13~18%, 낸드플래시는 10~15% 오를 것으로 전망했다.
'메모리 사이클' 넘어 'AI 사이클'
호황이 길어진다고 한국 업체에 유리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높은 메모리 가격과 수익성이 후발주자에게도 증설에 나설 여력을 주기 때문이다.
가장 빠르게 따라붙는 곳은 미국 마이크론이다. 지난해 월 4만~5만장 수준이던 HBM 웨이퍼 생산능력을 연말까지 월 10만장 안팎으로 늘릴 계획으로 알려졌다. 2분기 HBM 시장 점유율은 SK하이닉스 50%, 삼성전자 33%, 마이크론 18% 순이다.
마이크론은 내년까지 공급할 HBM 물량도 이미 판매를 마쳤다고 밝혔다. 미국 정부의 반도체 육성 정책과 고객사들의 공급망 다변화까지 맞물리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주도해온 시장에서 빠르게 입지를 넓히고 있다.
중국의 추격도 빨라지고 있다. 창신메모리테크놀로지(CXMT)는 최근 HBM3E를 소량 생산하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졌다. 알리바바 계열 T헤드와 캠브리콘 등이 자체 AI 칩에 적용해 시험 중이며 내년 대량 생산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차세대 D램용 5세대 기술 플랫폼 양산도 공식화했다.
범용 D램에서는 이미 점유율을 빠르게 높이고 있다. CXMT의 글로벌 점유율은 2분기 9.5%까지 올라왔다. 한국 업체들이 HBM과 서버용 메모리에 생산능력을 집중하는 틈을 파고든 것이다.
슈퍼사이클이 지금의 속도로 계속 이어질지도 변수다. 원화 강세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실적에 부담이다. 최근 두 달 사이 원/달러 환율이 200원 넘게 떨어지면서 달러 매출의 원화 환산액이 줄고 있다.
메모리 가격의 상승세가 둔화하고 있다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가격 급등에 따른 비용 부담이 스마트폰과 PC를 넘어 서버까지 번지면 수요가 약해질 수 있다. 공급 부족이 가격을 끌어올렸지만 지나친 상승은 결국 수요를 누를 수 있다는 얘기다.
AI 투자 속도를 둘러싼 논쟁도 불거지고 있다. 글로벌 AI 업계 일각에서는 대규모 데이터센터 투자와 개발 경쟁에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AI 개발에 제동이 걸리거나 기업들이 투자 효율을 따지기 시작하면 GPU·HBM·서버용 D램 수요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다만 이러한 변수들이 메모리 수요를 꺾을 정도로 현실화한 것은 아니다. AI 데이터센터 투자는 이어지고 있고 HBM 신규 주문에서도 뚜렷한 둔화 조짐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급증하는 AI 수요를 얼마나 빠르게 따라잡느냐가 당장의 과제인 셈이다.
이종환 상명대 시스템반도체공학과 교수는 "삼성전자가 HBM4에서 역전을 노리고 SK하이닉스도 주도권을 지키기 위해 공격적으로 움직이면서 양사 경쟁은 더욱 치열해질 것"이라며 "무엇보다 지금은 메모리 사이클이 아닌 'AI 사이클'인 만큼 강한 수요에 맞춰 생산능력을 확대, 시장을 선점한다면 미국 및 중국 업체들의 추격 속에서도 한국이 주도권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