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무에게도 들켜선 안 되는 비밀 편지를 안전하게 전달해야 한다고 가정해봅시다.
누구나 편지를 넣고 자물쇠로 잠글 수 있는 택배 상자가 있습니다. 이 상자를 열 수 있는 열쇠는 수신자만 가지고 있습니다. 중간에 누군가 택배 상자를 가로채더라도 열쇠가 없으면 비밀 편지의 내용은 볼 수 없습니다.
현재 인터넷과 금융거래 등에 쓰이는 '공개키 암호'가 바로 이와 비슷한 원리로 작동합니다. 누구나 공개된 자물쇠인 공개키로 정보를 암호화할 수 있지만, 이를 열어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개인키를 가진 수신자뿐입니다.
다시 말해 공개키 암호는 누구나 정보를 안전하게 보낼 수 있게 하면서도 받는 사람만 내용을 확인할 수 있게 만든 암호 방식입니다.
온라인 시대의 혁명
공개키 암호가 등장하기 전에는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이 같은 비밀번호를 미리 공유했습니다. 이를 '대칭키 암호'라고 합니다. 같은 비밀번호로 데이터를 암호화하고 풀기에 처리 속도가 매우 빠르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이 같은 비밀번호를 어떻게 안전하게 공유하느냐의 문제가 남아있습니다. 중요한 비밀번호를 통신망으로 보내면 중간에서 탈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거 은행에서 보안카드 등을 직접 수령했던 것도 이같은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렇다고 중요한 정보를 주고받을 때마다 상대방을 직접 만나 비밀번호를 전달할 순 없는 노릇이죠. 비밀번호를 안전하게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이 필요해진 것입니다.
이같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공개키 암호입니다. 통신망으로 비밀번호를 그대로 보내는 대신, 공개키라는 자물쇠로 잠근 상자에 넣어 전달하는 방식입니다. 중간에 해커가 상자를 가로채더라도 열쇠가 없으면 열어볼 수 없습니다.
게임 체인저의 등장

문제는 견고한 자물쇠를 무력화하는 게임 체인저가 등장했다는 겁니다. 바로 양자 컴퓨터입니다.
공개키 암호가 안전했던 이유는 일반 컴퓨터로 풀려면 수십년, 수백년이 걸릴만큼 어려운 수학 알고리즘을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일반 컴퓨터는 암호를 찾기 위해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계산해야 합니다.
하지만 양자 컴퓨터의 연산 방식은 다릅니다. 예를 들어 일반 컴퓨터가 비밀번호를 찾기 위해 0000부터 9999까지 하나씩 차례대로 입력한다면, 양자 컴퓨터는 모든 번호를 동시에 입력해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안전하다고 여겨졌던 공개키 암호도 양자 컴퓨터 시대에는 더이상 안전하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글로벌 IT·보안업계에서는 양자 컴퓨터의 상용화 시점을 2030년 전후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업계에서는 이미 암호 체계를 교체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양자컴퓨터가 상용화된 뒤 암호 체계를 바꾸면 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해커들의 공격 방식입니다. 지금 당장 암호를 해독할 수 없더라도 암호화된 중요 데이터를 미리 탈취해 저장해 둡니다. 그리고 충분한 성능의 양자컴퓨터가 등장하는 순간 그동안 보관해 둔 데이터를 한꺼번에 해독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미리 손을 써둬야 하는 거죠.
국방·금융·공공기록처럼 수십 년 동안 기밀을 유지해야 하는 정보는 지금은 안전하더라도 미래에 유출될 위험을 고려해야 합니다. 정부와 기업들이 양자 컴퓨터 시대가 본격화되기 전부터 차세대 암호 체계로의 전환을 서두르는 이유입니다.
두 가지 방패
그렇다면 양자 컴퓨터의 위협에 맞설 새로운 자물쇠는 무엇일까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번째는 양자키분배(QKD)입니다. 양자 상태는 누군가 중간에 들여다보기만 해도 그 상태가 깨진다는 물리적 특성을 지닙니다. 이 성질을 이용하면 키를 전달하는 도중 누군가 가로채려는 시도를 즉시 알아챌 수 있습니다.
QKD는 이론적으로 매우 강력한 보안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물리적인 양자 통신 장비가 필요합니다. 전용 장비와 통신망을 구축해야 해 비용 부담이 큽니다. 또 아직은 한 번에 전송할 수 있는 거리도 제한적이어서 먼 거리는 중간 지점을 거쳐 전달해야 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두번째는 양자내성암호(PQC)입니다. PQC는 물리 장비가 아니라 소프트웨어 알고리즘입니다. 양자 컴퓨터로도 풀기 어려운 새로운 수학 구조를 적용해 기존 암호 체계를 업데이트하는 방식이죠.
사실 지금 쓰는 암호도 컴퓨터 성능이 좋아질 때마다 지속적인 업데이트를 거쳐왔습니다. PQC도 연장선에 가깝습니다. 애플 아이폰, 삼성 갤럭시 등 스마트폰에도 적용된 기술입니다. 다만 QKD처럼 '이론적으로 완벽하다'는 증명은 없습니다. 더 강력한 공격 기술이 등장하면 이에 대응해 지속적인 고도화가 필요한 암호 기술입니다.
보안업계에서는 두 가지 방식을 모두 활용하는 전략을 택하고 있습니다. 물리적 성질과 수학 알고리즘을 동시에 결합해 이중 방어막을 치는 것입니다. 국내에서는 QKD는 보안이 최우선인 국방·금융 백본망에, PQC는 이미 깔린 장비를 대규모로 갈아엎기 어려운 일반 인프라에 적용하는 방식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양자컴퓨터의 등장으로 기존 자물쇠의 수명이 다해가고 있습니다. 그럴수록 보안업계는 핵심 국가 인프라부터 개인 스마트폰에 이르기까지 차세대 암호 체계로 전환을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습니다. 디지털 일상을 지키는 더 단단한 자물쇠를 준비하는 중인데요. 그 활약상을 기대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