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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받을 때는 청포묵 무침이 최고

  • 2015.04.17(금) 08:31

속된 말로 직장에서 상사한테 깨졌다. 그것도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이기에 억울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성질대로 들이받을 수도 없고 어떻게든 부글부글 끓는 속을 달래야겠는데 마땅한 방법이 없다. 열 받는다고 퇴근 후 술을 퍼마시면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된다.

 

이럴 때는 열을 가라앉히는 차분한 음식이 좋다. 술로 달래는 것 역시 방법이지만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스스로 어루만지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



 

그런데 술안주를 자세히 보면 열 받은 몸과 마음을 식혀줄 음식이 있다.  민속주점이나 한정식 식당에서 밑반찬 내지는 기본 안주로 종종 내놓는 것이 녹두로 쑨 하얀 묵에 미나리와 김 가루 뿌려서 무쳐놓은 청포묵이다. 막걸리를 비롯한 전통 민속주를 마실 때 흔히 볼 수 있는데 적지 않은 음식점에서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술안주로 청포묵을 내놓는 것에는 나름 이유가 있다.

 

청포묵의 주재료는 녹두로 열을 가라앉히는데 효과가 있다. 옛 의학서인 ‘동의보감’에 녹두는 성질이 차고 맛이 달며 독이 없다면서 열을 내리고 부은 것을 가라앉히며 소갈증을 멎게 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했다. 술을 마셔 몸에 열이 나고 입이 마를 때 술독을 해독시켜주는데 안성맞춤이다. 

 

명나라 때 의학서인 ‘본초강목’에도 녹두 탕으로 속을 풀어주는 해장법이 나오지만 우리 동의보감에도 녹두는 열이 나는 술독을 없애준다고 했으니 나름의 근거가 있는 상차림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시대 이후 현재까지도 술상에는 청포묵이 안주로 많이 올라오는 것인데 정조 때 시인 이옥(李鈺)의 시에 조선시대 술상에 오른 청포묵 안주가 그려져 있다.

 

“안주로는 탕평채가 한 가득 쌓였고/술자리에는 방문주가 흥건하다/하지만 가난한 선비의 아내는/입안에 누룽지조차도 넣지 못한다네”

 

탕평채(蕩平菜)는 녹두로 만든 청포묵을 재료로 만든 음식이고 방문주(方文酒)는 경남 밀양 지방에서 만들었던 명주다. 이옥은 정조 때 과거에 급제했지만 자질구레한 글이나 쓰고 다닌다며 정조에게 찍혀 중용되지 못하고 핍박 받던 인물로 당시 양반사회에서는 이단으로 취급 받았다. 그 때문인지 청포묵 무침인 탕평채가 나오는 시도 당시 양반사회 시각으로 보면 반항기 넘치고 삐딱하기 그지없다.

 

제철에 맞는 음식이 몸에 보약이 된다고 했는데 지금이 청포묵이 맛있을 때다. 요즘이야 묵도 슈퍼마켓에 가면 아무 때라도 사 먹을 수 있지만 옛날에는 계절에 따라 즐길 수 있는 묵이 달랐다. 맛이 상큼하고 시원한 청포묵은 봄부터 초여름이 제철이고 옥수수로 만든 올챙이묵은 여름이 제 맛이며 쌉쌀한 도토리묵은 가을에, 그리고 텁텁한 메밀묵은 겨울에 먹어야 별미다.

 

옛 풍속을 적은 ‘동국세시기’에는 음력으로 3월, 그러니까 이맘 때 청포묵을 만들어 먹는 것이 풍속이라고 했는데 묵을 잘게 썰어 초장으로 양념하면 시원한 것이 초여름까지 먹을 만 하다고 적었다. 이유는 열을 내려 더위를 식힐 수 있기 때문이다.

 

계절적으로 더위를 느끼려면 아직 시간이 남았지만 날씨 때문이 아니더라도 이래저래 열 받을 일이 많은 요즘이다. 열불이 날 때는 맛있는 청포묵으로 시원하게 속을 달래주는 것도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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