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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여명거리의 카퍼레이드

  • 2018.09.19(수) 17:29

▲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무개차를 타고 18일 평양순안공항에서 백화원 초대소로 이동하며 시민들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 평양사진공동취재단

이번 평양 남북정상회담의 하이라이트 가운데 하나는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카퍼레이드였다.

첫날(18일) 두 정상이 나란히 오픈카를 타고 환호하는 평양 시민들에게 손을 흔드는 장면은 다음날 모든 신문의 1면을 장식했다. 순안공항에서 숙소인 백화원 영빈관으로 이동하는 사이,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된 그 순간 진행된 깜짝 이벤트의 배경은 바로 '여명거리'였다.

북한이 전 세계에 보여주고 싶었던 여명거리는 김정은 위원장이 주도적으로 조성한 평양 내 대표적인 신도시다. 90만㎡ 면적에 들어선 여명거리의 연건축면적은 172만 8000여㎡에 달한다. 70층짜리 건물을 비롯해 44동, 4804가구에 달하는 초고층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평양 주재 외교관들 사이에서는 '평해튼'으로 불린다고 한다. 뉴욕의 중심지 맨해튼을 빗댄 표현이다.

기자는 10여 년 전 남북 교류가 활기를 띠었을 때 취재차 평양을 방문해, 시내를 잠깐 둘러본 적이 있다. 그 당시 평양은 꽃 피는 봄이었지만 온통 회색빛이었고 활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최근 방북했던 인사들한테서 평양이 달라졌다고 듣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화사하게 달라졌을 줄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북한이 변하고 있다는 증거는 곳곳에서 감지된다. 120년 만에 최고의 폭염이라던 올여름. 평양도 8월 초 37.9도로 관측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더위에 지친 평양 시민들이 즐겨 찾은 곳 중 하나는 워터파크인 문수물놀이장이었다. 이곳은 파도풀장, 대형 미끄럼틀, 피트니스센터, 실내 클라이밍장, 뷔페식당 등을 갖추고 있다. 올여름 17만명이 이용했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문전성시를 이룬 고객의 주류가 고위층이나 특권 계층이 아니라 일반인들이었다는 점이다.

놀이시설이 붐비고 도시 풍경이 화사해졌다는 것은 한마디로 먹고 살 만해졌다는 의미다. 완전하지는 않겠지만 식량난, 전력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다는 방증이다. 최근 들어 국제사회의 북한에 대한 제재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욱 놀랍다. 체제가 곧 붕괴되는 것 아니냐는 인식들이 은연중에 깔려있었기 때문이다. 대북 제재에 대한 국제사회의 공조가 얼마나 효율적인지는 차치하고서라도.

이번 평양 남북정상회담에는 경제인들이 대거 동행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김용환 현대자동차 부회장, 최태원 SK 회장, 구광모 LG 회장 등 4대 그룹 핵심 인사를 비롯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최정우 포스코 회장 등 17명이 특별수행원으로 참가했다. 대기업 총수들은 북한 경제개발 실무책임자인 리용남 내각부총리와 만났다. 면담 내용은 덕담을 주고받는 수준으로 구체적인 논의는 없었던 것 같다.

이에 대해 '그러려고 갔냐, 정치 행사에 들러리 선 것 아니냐'고 평가절하하기도 하고 '(그룹 총수들 방북이) 북측의 요청이었다, 우리 측이 결정했다'는 논란도 있다. 소모적인 논쟁을 넘어 큰 차원에서 봐야 한다. 이번 회담의 의미 중 하나는 북한이 핵·경제 병진 노선을 폐기하고 경제발전에 집중하겠다는 의지를 표출했다는 점이다. 실제로 공동선언에는 한반도 비핵화와 민족경제 균형 발전이 나란히 포함돼 있다.

더구나 지금은 대북 제재가 진행 중인 시점이다. 특히 미국의 경우 신경이 곤두서 있다.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우리 측에 '북한의 비핵화를 이룰 때까지 압박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고 '러시아와 중국의 제재 위반이 심각하다'며 유엔 안보리를 긴급 소집하기도 했다.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진전되지 않으면 이번에 남북이 합의한 경제협력은 구체화하기 힘든 형편이다.

그렇다고 제재가 끝나기만 마냥 기다릴 수는 없다. 북한 사정에 정통한 많은 전문가들은 "제재가 풀리면 이미 늦다"라고 단언한다. 북한과 중국 및 러시아의 협력은 꾸준히 진행돼 왔다. 또 제재가 풀리게 되면 미국 기업, 일본 기업의 북한 진출이 러시를 이룰 것이다. 그때 우리 기업들의 입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북한의 경협 스타일도 달라졌다고 한다. 2000년대 초부터 대북사업을 진행했던 한 사업가는 "예전에는 무조건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김정은 위원장 스타일은 우선 자기의 힘으로 진행하고 그 기반 위에서 협력을 요구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북한이 열리기 전에 대화의 끈을 만들어 놓아야 한다"는 조언이다.

지금은 남북 경제협력의 여명(黎明)이다. 곧 밝아올 그때를 위해 채비를 서둘러야 할 시점이다.

▲ 2017년 완공된 여명거리 /삼일회계법인·SGI컨설팅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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