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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스토리]헷갈리는 전자담배 규제

  • 2019.11.01(금) 10:00

정부, '액상형' 뒷북 규제에 소비자 '혼란' 초래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 (사진=보건복지부 제공)

보건복지부가 지난 23일 액상형 전자담배에 대해 '사용 중단'을 강력 권고한다고 발표했습니다. 이 제품들이 중증 폐 질환을 유발한다는 논란을 일으키고 있어서입니다. 

이후 GS25를 시작으로 CU와 세븐일레븐, 이마트24, 미니스톱 등이 줄줄이 관련 제품 판매 및 공급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로써 주로 편의점을 중심으로 판매됐던 쥴랩스의 '쥴'과 KT&G의 '릴 베이퍼'는 국내 담배 시장에서 사실상 퇴출되는 분위기입니다.

앞서 미국에서는 지난 15일 기준으로 액상형 전자담배로 인한 중증 폐 손상자가 1479명에 이르고 사망자는 33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논란이 됐습니다.

이에 따라 미시간 주와 뉴욕 주는 과일향이 첨가된 전자담배 판매를 금지했습니다. 매사추세츠 주의 경우 모든 전자담배를 4개월간 팔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미국 최대 유통 업체인 월마트도 판매를 중지하면서 주목받았습니다.

이런 소식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액상형 전자담배 사용자들의 우려가 커졌던 만큼 보건복지부의 이번 조치는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보입니다.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그러나 이런 조치를 발표한 시기나 방식에서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동안 아무 대책 없이 두 손 놓고 있다가 부랴부랴 대응책을 내놓느라 소비자들의 혼란만 초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액상형 전자담배가 등장한 건 15년 전쯤입니다. 이후 국내에서는 반짝 인기를 끌다가 금세 사그라들었고요. 전 세계적으로는 꾸준히 시장이 커졌다고 합니다. 특히 미국에서는 지난 2015년 쥴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전자담배 제품이 등장하면서 붐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오래전부터 판매되던 액상형 전자담배가 최근 들어 더욱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선 미국에서는 '쥴링(JUULING·쥴을 피운다는 의미의 신조어)'이라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청소년 흡연율이 빠르게 증가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습니다.

쥴은 기존 액상형 전자담배와는 다르게 제품 크기가 작아 휴대하기가 좋고, 또 구매가 간편해 청소년 흡연을 유발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논란 속에서 액상형 전자담배로 인한 사망자가 늘고 있다는 소식이 더해지면서 미국 정부가 규제 강화책을 꺼내기 시작한 겁니다.

그런데 이 쥴이 우리나라에 진출한 건 지난 5월입니다. 당시 이미 미국에서는 청소년 흡연과 유해성 문제로 논란이 되고 있던 때인데요. 앞서 미국흉부학회의 발표에 따르면 쥴이 폐염증과 활성산소를 발생시킨다고 경고한 바 있습니다. 미국의 한 학술지에는 쥴이 "아이들에게 강력한 유혹을 준다"고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이런 와중에 쥴이 국내에 진출하면서 많은 흡연자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출시 초반에는 한 달 반 만에 610만 포드(1포드는 담배 한 갑에 해당)를 판매하는 등 소비자들의 반응도 좋았고요.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정부는 액상형 전자담배에 대해서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미국에서의 유해성 논란이 사그라들지 않자 보건복지부는 그제서야 지난달 20일 '사용 자제 권고'를 발표했습니다. '유해성이 의심되지만,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는 게 당시 복지부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지부는 한 달 만에 '자제 권고'에서 '중단 권고'로 입장을 바꿔 내놨습니다. 유해성 연구 결과나 사례 분석 등 의학적인 근거를 확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이렇게 입장을 달리 한 이유는 바로 '대통령의 지시' 때문이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액상형 전자담배에 강력히 대처하라"고 지시했다고 하는데요. 이에 따라 복지부는 "현 상황은 담배와 관련된 공중보건의 심각한 위험으로 판단된다"며 새로운 권고안을 내놓은 겁니다.

박능후 복지부 장관은 지난 28일 국회에서 이번 조치에 대해 "과거 가습기 살균제라는 참혹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유해성이 증명되고 난 뒤 대처하는 것은 늦다"는 입장을 밝혔는데요. 이런 논리라면 처음부터 '경고'의 메시지를 내놓지 않은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쥴 등 액상형 전자담배가 국내에 출시된 이후 적지 않은 소비자들이 해당 기기를 구매했을 텐데요. 정부가 이런 입장을 조금만 더 빨리 내놨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국내에서 판매되고 있는 액상형 전자담배 제품들에는 미국에서 논란이 되는 유해 물질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정부도 이를 잘 알고 있습니다. 박 장관은 "미국에서 판매되는 액상형 전자담배와 우리나라 것과는 성분 면에서 차이가 있다"며 "미국은 대마, 비타민 E 아세테이트 등이 있고, 우리는 적어도 대마 성분 있는 것은 판매를 안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도 정부가 이런 규제책을 내놓은 것은 대마 성분이 없는 액상형 전자담배에서도 환자가 나왔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건강과 직결된 문제이니 만큼 이런 보수적인 자세가 필요할 것 같기는 합니다. 

/사진=이명근 기자 qwe123@

그러나 이런 논리에도 모순이 있습니다. '유해성'이 명백하게 입증된 일반 담배의 경우 '합법적'으로 팔리고 있는데 유독 액상형 전자담배 제품에 대해선 이런 '경고'를 하는 게 합리적이냐는 지적입니다.

한국전자담배산업협회는 지난 31일 이와 관련한 기자회견을 열었는데요. 이 자리에서 이병준 한국전자담배산업협회 회장은 "매년 6만명의 사망자를 발생시키는 일반 궐련 담배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이 단 한 명의 의심 환자가 발생한 것만으로 판매 중단을 권고한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지적했습니다.

전자담배 업계 관계자들은 "정부의 이번 발표가 마치 일반 담배보다 액상형 전자담배가 더 유해한 것으로 비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전자담배 흡연자들이 금연을 하는 게 아니라 일반 담배로 돌아가게 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입니다.

이런 식의 논란은 앞서 정부가 아이코스 등 궐련형 전자담배에 대한 유해 성분 분석을 발표할 때도 있었는데요. 당시 복지부는 일반 궐련에 비해 궐련형 전자담배에서 더 많은 타르가 나왔다는 점을 강조해 발표했습니다. 이는 마치 일반 담배가 더 낫다는 오해를 초래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담배는 일반 담배든 궐련형 전자담배든, 또 액상형 전자담배든 모두 해롭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입니다. 물론 정부도 이를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럼에도 정부의 준비 안 된 '뒷북 대응'으로 다소 부실해 보이는 대책을 부랴부랴 내놓는 것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괜한 오해와 논란만 일으키는 모습입니다. 앞으로 나올 더욱 다양한 형태의 전자담배에 대응하기 위해서라도 법체계 개선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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