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광고]는 우리나라 식품유통업계의 광고 역사에 한 획을 그은 광고들을 소개하고 그 뒷 이야기들을 펼쳐보는 콘텐츠입니다. 꼴찌 브랜드를 단숨에 1위로 만든 '최고의 광고'부터 잘 나가던 브랜드의 몰락을 불러온 '최악의 광고'까지, '광고의 정석'부터 '광고계의 이단아'까지. 우리의 인상에 남았던 여러 광고 이야기를 나눠 볼 예정입니다. 여러분의 추억의 광고는 뭔가요? 혹시 이 광고 아닌가요.[편집자]
붉은 머리의 빙그레우스 왕자가 대신들과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왕자의 머리 위엔 노란 바나나우유 모양의 관이 얹혀 있다. 시덥잖은 유머를 시도하다가 재판에 소환된 왕자. 6개월간 농담 금지라는 처벌을 받게 되자 노래를 시작한다. "웃음을 만드는 자 빙그레 메이커~" 대작 뮤지컬 못지 않은 웅장한 노래가 이어진다. 세상에 빙그레가 가득해지는 그 날까지.
브랜드 마케팅의 혁명
2020년 2월. 빙그레의 공식 인스타그램에 한 이미지가 올라왔습니다. 사람들은 "담당자 퇴사하냐", "해킹당했냐"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인스타에 올라온 사진이 빙그레의 신제품도, 프로모션 이미지도 아닌 웬 '로판풍' 빨간머리 왕자님의 얼굴이었기 때문입니다. 노란 바나나맛우유 왕관과 빙그레의 'B' 로고 귀걸이를 단 이 남자의 이름은 '빙그레우스 더 마시스'. 빙그레 왕국의 왕자였습니다.
이후 빙그레는 이 빙그레우스 왕자와 주변인들을 등장시킨 애니메이션을 공개합니다. 앞서 보여드린 바로 그 광고 '빙그레 메이커를 위하여'입니다. 자연스럽게 제품을 광고하는 수준을 넘어, 광고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 공들인 캐릭터 디자인과 뮤지컬 넘버로 화제가 됐었죠.
바나나맛우유와 꽃게랑, 더위사냥, 투게더 등 빙그레의 대표 제품들을 로판풍 캐릭터로 재해석한 이 영상은 2020년 유통업계에서 가장 성공한 마케팅으로 회자됩니다. 또 주요 유통·식품 기업들이 '세계관'을 도입하는 데도 큰 역할을 했죠. 이후 줄줄이 비슷한 애니메이션·로판풍 캐릭터를 차용한 브랜드들이 넘쳐났습니다. 물론 그 누구도 원조를 따라잡을 순 없었지만요.
이 광고는 '서브컬처 마케팅'의 표본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장르를 심도있게 파는 '덕후'들의 심리를 잘 파악하고 이를 '작품'에 반영했습니다. 배경을 '로판 풍'으로 정한 것부터 그렇죠. 웹소설계에서 중세풍 로맨스 판타지의 인기가 정점에 달했던 시기입니다. 썰렁한 개그를 치다가 농담 금지령을 받는다는 썰렁한 내용에 맞지 않는 진지한 순정만화풍 그림체와 웅장한 합창은 '병맛' 코드와도 연결됩니다.
장르를 뮤지컬로 잡은 것 역시 우연이 아닙니다. 로판의 최대 소비자인 2030 여성들은 뮤지컬 시장의 최대 소비자이기도 합니다. 빙그레는 주인공인 빙그레우스 역의 성우로 인기 뮤지컬 배우 김성철을 기용해 '뮤덕(뮤지컬 덕후)'들의 관심을 끌어모았습니다. 김성철 배우가 노래를 부르는 '메이킹 필름'을 추후 공개하기도 했죠.
광고 자체로도 훌륭합니다. 빙그레 제품을 사라는 말도, 빙그레라는 기업을 사랑해 달라는 말도 없지만 광고를 보고 나면 빙그레에 대한 호감이 절로 생깁니다. 창립 50년이 넘은 오래된 식품 기업이 갑자기 MZ세대 트렌드의 최전선에 서게 됐으니, 잘 만든 광고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반쯤 돌았나
빙그레우스 세계관이 공개됐을 당시 업계의 반응은 "어떻게 이런 걸 생각해 냈을까" 보다는 "어떻게 이게 위에서 통과가 됐지"에 가까웠습니다. 아이디어도 좋았지만 이런 톡톡 튀는 기획이 실현될 수 있는 토양도 남달랐다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빙그레의 한 발 더 나아간 마케팅은 '빙그레우스'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지난 2017년엔 바나나맛우유를 마실 때 꼭 빨대를 사용한다는 점에서 착안한 이색 빨대 '마이스트로우'를 내놔 품귀 현상을 빚었습니다. 물론 단순한 빨대가 아니었죠. 연인끼리 사용하는 '러브 스트로우', '누워서도 바나나맛우유를 마실 수 있는 '링거 스트로우', 일반 빨대보다 직경이 4배 큰 '자이언트 스트로우' 등 기상천외한 빨대를 선보였죠.
빙그레우스를 선보인 직후엔 장수 스낵 '꽃게랑' 브랜드를 활용한 패션 브랜드 '꼬뜨-게랑'을 공개했습니다. 꽃게랑을 프랑스 명품 브랜드처럼 읽은 거죠. 인기 가수이자 패션 아이콘인 지코를 모델로 기용해 명품 화보 콘셉트의 광고를 찍었습니다. 이듬해엔 꽃게랑이 러시아에서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식에 러시아식 제품명인 '끄랍칩스'를 사용한 '역수입 콘셉트' 제품을 내놓기도 했죠. 조용한 기업이었던 빙그레가 가장 많은 관심을 받았던 시기였을 겁니다.
빙그레우스의 성공 이후 많은 기업·브랜드들이 애니메이션 스타일의 세계관 마케팅에 나섰습니다. 삼양식품은 2021년 '산양' 캐릭터를 내세운 애니메이션 뮤지컬 광고 '평범하게 위대하게'를 공개해 그 해 대한민국 광고대상을 수상했고요. 롯데칠성도 신제품 소주 새로를 출시하며 구미호 캐릭터 '새로'를 내세운 스토리텔링에 나서 성공을 거뒀습니다.
빙그레의 '빙그레우스 세계관' 마케팅은 국내 식품 기업들의 안일한 마케팅에 경종을 울렸습니다. 국내 주요 식품 기업들은 대부분 업력이 길고 장수 브랜드가 많습니다. 그만큼 마케팅도 '하던 대로' 하는 관성이 짙었습니다. 좀처럼 선호 브랜드가 바뀌지 않는 식품 브랜드의 특성 상 하던 대로만 하면 매출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른 기업들 못지 않게 장수 브랜드가 많은 빙그레가 틀을 깨는 시도에 나서면서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수십년 된 브랜드도 트렌디하게 되살아날 수 있다는 게 확인된 겁니다. 실제 빙그레우스 세계관을 처음 선보인 2020년 9000억원 수준이었던 빙그레의 매출은 지난해 1조3000억원대(개별 기준)로 고속 성장했습니다. 투게더(1974년), 꽃게랑(1986년), 메로나(1992년) 등 수십년 된 '올드 브랜드'가 MZ픽으로 떠오르기도 했죠. 잘 만든 세계관 하나는 열 히트상품이 부럽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