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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드 스토리]망한 줄 알았는데…'덕후'가 살린 쇼핑몰

  • 2026.09.21(월) 07:00

국제전자센터, 공실률 0%대…권리금까지 붙어
신도림·마리오아울렛·AK수원도 '서브컬처 러시'
2030 지갑에 살아난 상권…기존 상인은 '한숨'

서초동 국제전자센터. / 사진=정혜인 기자 hij@

오랜 세월 침체되어 있던 도심 노후 쇼핑몰들이 '서브컬처' 콘텐츠로 반전의 계기를 마련하고 있습니다. 가전, 패션 매장이 떠난 자리를 이제는 '가챠(뽑기)'와 '피규어', '애니메이션 굿즈'가 채우면서 2030 마니아들이 몰려들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황에도 아낌없이 지갑을 여는 이들의 뚜렷한 소비 행태가 죽어가던 상권의 체질을 바꾸고 있습니다.

부활하는 옛 상가

이런 변화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곳은 서울 서초구의 국제전자센터(국전)입니다. 1997년 개장한 이곳은 용산전자상가와 함께 국내를 대표하는 전자상가였는데요. 외환위기와 겹쳐 개장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이후에는 이커머스 시장이 급격하게 성장하면서 직격탄까지 맞았습니다. 전자제품과 게임기를 직접 발품 팔아 살 이유가 사라지면서 방문객의 발길이 끊겼고요. 한때 상가 공실률은 두 자릿수를 기록했다고 하죠.

반전의 계기는 피규어·가챠 전문 매장들이었습니다. 원래 임대료가 낮은 국전 9층 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이른바 '서브컬처' 매장들이 그 주인공입니다. 서브컬처란,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피규어 등 특정 장르를 중심으로 마니아층의 깊은 취향을 파고드는 하위문화를 뜻합니다. 최근 인기가 높은 가챠나 캐릭터 굿즈 등도 대표적인 서브컬처 콘텐츠로 분류됩니다.

국전 9층에 모여 있던 이 서브컬처 매장들은 점차 8층과 7층으로 내려오기 시작하더니 최근 1~2년 사이에는 아예 건물 전 층으로 빠르게 번져 나갔습니다.

서초동 국제전자센터에서 쇼핑 중인 외국인 관광객. / 사진=정혜인 기자 hij@

지금은 국전 내 대부분의 매장에서 피규어와 가챠를 찾아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9층에서 탄탄한 수요를 검증받은 기존 업주들이 아래층에 추가로 매장을 내는가 하면, 외부에서 새롭게 국전에 들어온 신규 업주들도 크게 늘었습니다. 코로나19 시기까지만 해도 임대인들이 세입자를 찾지 못해 관리비만 받고 월세를 포기하는 일이 흔했던 것과 비교하면 크게 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카메라를 판매하는 상인 이 모 씨는 "지금 여기에는 문 닫혀 있는 곳이 없을 정도"라며 "권리금도 2000만~2500만원씩 붙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주말이면 에스컬레이터마다 사람들이 빽빽하게 줄을 서서 올라갈 정도로 붐빈다고 하는데요. 유동인구가 몰릴 때는 내부 공기가 탁해 마스크를 쓰고 있어야 할 정도라고 합니다.

국전을 찾는 외국인 관광객들도 크게 늘었습니다. 일본인과 중국인 관광객이 눈에 띄게 늘었으며 서구권 관광객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일부 동남아 관광객의 경우 버스를 대절해 국전을 방문하기도 합니다.

상가 자체에 손님이 크게 늘면서 상인들도 반기는 분위기입니다. 이씨는 "가챠 매장이 늘어나면서 손님이 늘어나 우리 같은 전자제품 판매 매장에도 도움이 된다"고 밝혔습니다.

번지는 서브컬처 상권

이런 현상은 국전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서울 서남권을 대표하는 전자상가 신도림 테크노마트도 최근 캐릭터숍과 가챠 매장을 내세우며 변신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서울 금천구 마리오아울렛은 한발 더 나가 매장 공간을 '글로벌 IP몰'로 재편하는 중입니다. 세가, 스퀘어에닉스 등 일본 유명 게임사와 손잡고 게임 뮤지엄과 체험형 콘텐츠 공간을 꾸미면서인데요. '패션 아울렛'이라는 정체성 자체를 바꿔 상설 IP 콘텐츠 공간으로 키우겠다는 계획입니다.

AK플라자 수원점. / 사진=AK홀딩스

중소 쇼핑몰뿐만 아니라 대기업도 가챠·굿즈 콘텐츠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AK플라자 수원점이 진행한 'AK 홍대 프로젝트'가 대표적입니다. AK플라자 홍대점에서 검증된 애니메이트, 건담베이스, 이치방쿠지, SMG스토어, 더쿠 등의 브랜드를 지난해 9월부터 올해 6월까지 수원점에도 그대로 들여온 프로젝트였는데요. 인근에 스타필드 수원점, 타임빌라스 수원 등이 잇따라 들어서면서 고객이 빠져나가자 2030 고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AK 홍대 프로젝트가 진행된 기간 동안 수원점 전체 매출은 전년 대비 3.5% 늘었습니다. 특히 키덜트 카테고리 매출이 35.3%나 증가했는데요. 서브컬처 콘텐츠가 점포 전체의 매출 반등을 이끈 셈입니다. 이에 AK플라자 수원점은 최근 아예 '팝토피아'를 열며 이런 서브컬처 매장을 상설화했습니다.

큰 씀씀이까지

오프라인 유통업체들이 잇따라 서브컬처 매장을 들이는 것은 확실한 집객 효과 때문입니다. 전통적인 패션이나 가전 매장은 온라인 쇼핑에 밀려 방문객을 끌어모으지 못하면서 공실만 늘고 있습니다. 반면 가챠와 캐릭터 굿즈 매장은 2030 마니아층을 유입시키며 새로운 활로를 열고 있습니다.

2030 마니아들이 한 번 지갑을 열기 시작하면 과감하게 소비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가챠는 한 번에 1000원에서 1만원 안팎으로 가격 부담이 적어 진입 장벽이 낮습니다. 원하는 캐릭터나 한정판 아이템이 나올 때까지 반복해서 지출하는 소액 다량 소비 성향도 크죠.

이 씨는 "한 30대 손님이 가챠 기기 앞에서 5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11번을 뽑으며 총 9만7600원을 썼다"고 전했는데요. 그만큼 한 번 지갑을 열면 크게 쓰는 경향이 뚜렷하다는 겁니다. 

여기에 리셀 시장도 가챠 인기에 불을 붙이고 있습니다. 단종된 피규어나 희귀 굿즈가 원가보다 높은 가격에 거래되면서 이들의 소비는 취향을 넘어 투자 목적으로까지 확장되고 있습니다.

서초동 국제전자센터. / 사진=정혜인 기자 hij@

오프라인 매장만의 체험형 콘텐츠도 2030세대를 끌어당기는 요인입니다. 온라인 쇼핑은 화면 속 결제 한 번으로 끝나지만, 오프라인 매장에서는 직접 손잡이를 돌리고 캡슐을 열어보는 순간까지의 과정을 즐길 수 있습니다.

과거 일본 도쿄 아키하바라 등지에서나 소비하던 문화를 국내 매장에서 층층이 향유할 수 있다는 점도 주효했습니다. 이러한 현장 경험은 뽑기 인증과 득템 후기 형태로 SNS를 통해 퍼지며 다른 마니아들의 재방문으로 이어집니다.

다만 이 같은 변화의 그늘도 존재합니다. 오랫동안 국제전자센터에서 전자제품을 팔아온 기존 상인들에게는 상권의 부활이 마냥 반갑지만은 않다고 하는데요.

이 씨는 "장사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임대료도 많이 올라간 게 사실"이라고 말했습니다. 마니아층의 유입으로 상가가 살아나는 과정에서 임대료와 권리금이 치솟아 기존 상인들이 부담을 떠안게 된 겁니다. 가챠·피규어 매장이 앞으로 얼마나 더 확장될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불거지는 신구 상인 간의 갈등이 어떻게 변화할지 지켜봐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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