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희귀질환 치료제의 건강보험 등재 기간을 기존 240일에서 최대 100일 이내로 줄이는 신속등재 시범사업에 나섰다. 희귀질환은 환자 수가 적고 치료제가 많지 않아 신약이 개발돼도 건강보험 적용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은 만큼, 등재 절차를 줄여 환자들의 치료 접근성을 높이겠다는 취지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시범사업 대상 선정 과정에서 해외에서 이미 건강보험 급여를 받고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판단한다는 점을 두고 아쉬움이 나온다.
희귀질환은 국가와 인종에 따라 발병률과 환자 규모, 치료 환경이 다른 만큼, 해외에서 급여가 이뤄졌는지를 기준으로 국내 환자의 치료 접근성 필요성까지 판단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다.
서구권과 국내 희귀질환 발병 양상 차이
17일 업계에 따르면 복지부는 오는 31일까지 신속등재 시범사업에 참여할 제약사와 대상 품목을 모집하고 있다. 대상은 희귀질환 산정특례 대상 적응증을 보유한 치료제 가운데 신약의 가격을 정하거나 건강보험 급여를 재평가할 때 기준으로 삼는 'A8 국가(미국·영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스위스·일본·캐나다 등 주요 8개국)' 중 3개국 이상에서 건강보험 급여가 적용된 품목이다.
이와 관련해 업계에서는 해외 급여 여부를 주요 진입 기준으로 삼는 방식이 국내 희귀질환의 특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희귀질환은 국가와 인종에 따라 발병률과 환자 규모, 치료 환경이 다른 만큼 국내 환자의 치료 필요성을 판단할 때 해외 급여 여부와 국내 상황을 함께 살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희귀질환 가운데 서구권보다 아시아권에서, 또는 해외보다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발병률을 보이는 질환이 있다. 이는 희귀질환 치료제의 급여 필요성을 판단할 때 해외 급여 사례뿐 아니라 국내의 질환 분포와 환자 특성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한 예로 양측 뇌혈관의 내벽이 두꺼워지면서 일정한 부위가 막히는 희귀질환인 모야모야병은 한국과 일본 등 동아시아 지역에서 서구권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유병률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그룹과 CJ그룹 오너일가의 유전병으로 알려진 샤르코마리투스병(CMT) 역시 해외보다 국내에서 상대적으로 높은 발병률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유전성 희귀질환이다. CMT는 말초신경이 손상되면서 손발 근육 위축과 변형, 감각 저하 등을 유발한다.
이들 질환은 현재 근본적인 치료제가 없어 이번 신속등재 시범사업의 직접적인 대상 사례는 아니다. 다만 희귀질환은 국가별로 발병 양상과 환자 규모가 크게 다를 수 있다는 점에서, 향후 치료제가 개발된 경우 해외 급여 여부만으로 국내 환자의 치료 접근성 필요성을 판단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국내 맞춤형 기준 마련해야
업계에선 해외에서 급여가 적용되지 않았다는 결과만 볼 것이 아니라, 그 배경까지 살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해당 국가에서 환자 규모나 미충족 의료수요가 적어서인지, 치료제 개발 수준이나 급여 제도의 차이 때문인지에 따라 의미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외 급여 사례가 충분하지 않더라도 국내 환자 규모가 상대적으로 크거나 기존 치료 대안이 부족한 경우에는 이를 별도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희귀질환은 환자 수가 적은 만큼 국가별로 질환의 우선순위나 치료제 개발·급여 상황이 다를 수밖에 없다"며 "한국에서 상대적으로 환자가 많이 발생하는 질환이나 국내에서 개발된 치료제의 경우 해외 급여 사례가 충분하지 않더라도 국내 환자의 치료 필요성을 별도로 평가할 수 있는 맞춤형 기준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해외 기준 넘어…한국형 희귀질환 급여체계 필요
해외에서 인정된 기준을 국내에 가져와 적용하는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해외 제도를 뒤따라가는 방식에서 벗어나 우리나라의 희귀질환 환자 특성과 의료환경을 반영한 독자적인 급여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외 사례를 답습하기보다 국내 환자 데이터와 의료현실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만의 판단 기준을 선제적으로 마련하고, 나아가 글로벌 희귀질환 치료 급여 기준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설명이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A8 국가의 급여 여부를 참고자료로 활용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이를 신속등재의 기본 진입 요건으로 설정한 것은 다소 경직된 접근"이라며 "해외 제도를 그대로 따라가기보다 국내 환자 데이터와 질환 특성을 기반으로 독립적인 평가 기준을 마련하고, 우리나라가 희귀질환 치료 접근성에 관한 글로벌 기준을 선도할 수 있도록 제도를 설계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