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통상 압박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옥죄고 있습니다. 중국산 제품의 불법 환적(운송 도중 다른 선박으로 옮기는 화물) 단속에 나서면서 한국을 위험 국가군으로 분류, '경기 반도체 벨트'까지 중국산 반도체가 미국으로 흘러가는 잠재적 경로로 지목했는데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미국 내 메모리 생산시설 투자 요구설까지 불거졌습니다. 미국으로 들어가는 반도체는 더 깐깐하게 들여다보고, 미국 안에서는 더 많이 만들라는 압박이 거세지는 셈입니다.
3500억달러 규모 대미 투자 이행을 둘러싼 한·미 협상까지 속도전을 요구받으면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고민도 깊어지고 있습니다.
'우회로' 의심…수출 문턱 높아지나
최근 미국 백악관 무역제조업정책국은 '거대한 환적 사기(The Great Transshipment Scam)'라는 제목의 25쪽짜리 보고서를 내놨습니다. 중국 기업이 2018년 미·중 무역전쟁 이후 고율 관세를 피해 제3국을 통한 우회 수출을 조직적으로 늘렸다는 내용입니다.
미국이 중국산 제품에 매기는 평균 관세율이 50%에 달하자 관세가 낮은 제3국을 '우회로'로 활용한 것을 사기로 규정한 것입니다. 중국산 제품을 제3국에서 단순 조립·재포장한 뒤 다른 나라 제품처럼 미국으로 보내거나 라벨과 송장을 바꿔 원산지를 속였다고 보고 있습니다.
백악관이 파악한 우회 수출망은 전 세계 40여개국에 걸쳐 있습니다. 위험 국가를 경제 규모와 중국 공급망과의 연계 정도 등에 따라 3개 유형으로 나눴는데요. 한국은 캐나다·유럽연합(EU)·인도·이스라엘·일본·멕시코·대만 등과 함께 1유형인 '다각화된 대규모 국가'에 포함됐습니다. 산업 기반이 크고 대미 수출망이 잘 갖춰진 만큼 정상적인 교역 과정에 중국산 제품의 불법 환적이 섞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겁니다.
한국 반도체 산업의 심장부인 '경기 반도체 벨트'도 콕 집었습니다. 중국과 연계된 집적회로가 이곳을 거쳐 미국으로 유입되면 피닉스·오스틴·포틀랜드·산호세 등 현지 반도체 생산 거점에 부담을 줄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미국이 실제로 경기 반도체 벨트에서 불법 환적을 적발한 것은 아닙니다. 국가와 지역 간 무역 흐름을 토대로 잠재적인 노출 위험을 따져본 것이라는 게 백악관 측 설명이죠.
미국이 가늠한 환적 규모는 천문학적입니다. 백악관은 중국산 제품의 불법 또는 의심 환적이 연간 400억~3030억달러(약 57조~430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했습니다. 중국산 제품이 제3국산으로 둔갑해 낮은 관세를 적용받으면서 미국이 놓치는 관세 수입은 연간 수백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봤죠.
미국은 향후 단속에 인공지능(AI)까지 동원합니다. 트럼프 행정부는 '디텍티브 보더(Detective Border)'를 구축해 선적 데이터·과거 운송 경로·생산능력·기업 소유관계 등을 분석할 계획입니다. 포장 형태와 항만 X선 영상까지 대조해 신고한 원산지가 실제와 일치하는지 가려낸다는 건데요. 한국 기업 입장에선 미국으로 제품을 보낼 때 원산지를 입증하고 공급망을 추적하는 절차가 지금보다 까다로워질 수 있습니다.
한국 반도체 영향은?
이 보고서를 받아 본 '경기 반도체 벨트'는 긴장하고 있습니다. 당장 직접적인 피해는 없겠지만 파장이 커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반도체전문연구원은 "한국이 미국에 직접 수출하는 반도체 물량 자체가 그렇게 많지 않다"며 "메모리 반도체는 미국이 당장 대체할 수 있는 공급처도 마땅치 않아 우리 반도체 기업에 미치는 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습니다. 올해 7월 기준 한국의 전체 반도체 수출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10.4% 수준입니다.
변수는 환적 조사가 어디까지 번지느냐입니다. 미국향 반도체 수출 비중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는 점도 신경 쓰이는 대목입니다. 2018년 3%대에 그쳤던 비중은 2021년 7%, 2024년 8%까지 높아졌고 올해는 10%대를 넘어섰습니다. 미국이 조사 결과를 향후 국가별 무역협상에 참고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긴 만큼 한·미 통상 협상의 새 압박 카드로 쓰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환적 단속이 가뜩이나 복잡한 한·미 통상 관계에 새로운 불씨로 떠올랐다는 점도 부담입니다. 미국에서는 한국이 지난해 관세 협상에서 약속한 대미 투자를 예상보다 더디게 이행하고 있다는 불만이 커지고 있습니다. 한·미가 합의한 투자 규모는 3500억달러에 달하지만 아직 첫 사업도 확정하지 못했습니다.
정부는 '1호 프로젝트'를 구체화하기 위한 막판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지난 17일(현지시각) 워싱턴DC에서 하워드 러트닉 미 상무장관과 대미 투자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지난달에 이어 약 3주 만에 다시 미국을 찾은 겁니다. 이르면 이달 말, 늦어도 다음 달 초에는 첫 사업을 발표한다는 목표입니다.
미국은 재촉하고 있습니다. 미국 정치전문매체는 한·미 협상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협상이 트럼프 행정부의 예상보다 늦어지고 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 소식통은 한국을 "역대 가장 느린 협상가"라고 표현했죠. 러트닉 장관도 지난달 한·미조선협력센터(KUSPC) 개소 행사에서 "말이나 양해각서가 아닌 선박 건조 숫자로 평가할 것"이라며 압박했습니다.
첫 사업으로는 텍사스주 가스복합화력발전소가 유력하게 거론됩니다. 총사업비 198억달러를 들여 6.3GW 규모 발전소를 짓고 인근 AI 데이터센터에 전력을 공급하는 사업입니다. 안정적인 수요처를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후보보다 사업성이 높다는 평가입니다. 후속으로는 텍사스주 데이터센터와 미국 서부지역 탄소 포집·저장(CCS) 시설 등이 검토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美 메모리 투자 압박 커질라
에너지 사업을 중심으로 협상이 진행되던 와중 반도체도 쟁점으로 떠올랐습니다. 미국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현지 메모리 생산시설까지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흘러나오면서입니다.
양사는 이미 미국에 대규모 반도체 투자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텍사스주 테일러에 파운드리 공장을 짓고 있고 SK하이닉스는 인디애나주에 HBM 첨단 패키징 공장을 구축 중입니다. 하지만 메모리 전공정 생산기지는 아직 미국에 없습니다. 이 가운데 지난 13일 청와대 비공개 통상회의에서도 미측의 메모리 투자 요구가 논점으로 다뤄진 것으로 알려졌죠.
우선 정부는 반도체가 대미 전략투자 1호 후보라는 보도에 선을 그었습니다. 청와대와 산업통상부는 "대미 전략투자 1호 후보 프로젝트로 반도체를 논의 중이라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죠.
그렇다고 반도체 업계가 마음을 쉽사리 놓긴 어렵습니다. 미국은 자국 내 반도체 생산 확대를 꾸준히 요구해 왔습니다. 이번 첫 사업에서 메모리가 빠지더라도 향후 협상 테이블에 다시 오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메모리 팹은 발전소나 데이터센터처럼 정부 간 합의만으로 속도를 낼 수 있는 사업이 아닙니다. 공장 하나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중장기 생산전략을 좌우합니다. 수백억달러가 들어가는 데다 투자 결정부터 건설·장비 반입, 양산까지 수년을 내다봐야 하죠.
더 큰 문제는 경제성입니다. 메모리는 공장을 대규모로 돌려 생산량을 늘리고 개당 원가를 낮춰야 경쟁력이 생깁니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보다 인건비와 건설비는 물론 전력·용수 비용까지 높습니다. D램과 낸드 가격이 업황에 따라 크게 출렁이는 산업 특성도 걸림돌입니다. 불황이 닥쳐 생산량을 줄여도 막대한 고정비는 고스란히 남기 때문입니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메모리는 대규모 생산능력과 높은 가동률이 수익성을 좌우하는 산업"이라며 "미국에 생산라인을 구축하더라도 충분한 물량을 안정적으로 확보하지 못하면 투자 효율성이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관건은 미국의 높은 생산비를 무엇으로 메우느냐입니다. 미국 정부가 충분한 보조금과 세제 혜택을 제공하고 빅테크와 장기 공급계약까지 확보할 수 있다면 계산은 달라질 수도 있는데요. 김 교수는 "원가만 보면 불리하지만 보조금·관세·고객 확보·공급망 안정성까지 종합하면 전략적 가치가 있을 수 있다"며 "미국 정부가 어느 정도 인센티브를 제공하느냐가 투자 경제성을 결정할 핵심 변수"라고 진단했습니다.
"협상 서두르되 메모리 주도권 지켜야"
미국 투자가 현실화하면 국내 생산계획도 영향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호남권을 비롯한 국내 곳곳에서 대규모 증설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미국 메모리 공장까지 더해지면 자금뿐 아니라 전문 인력과 장비를 어느 생산거점에 먼저 투입할지 따져야 합니다.
국내외 거점의 역할을 분명히 나누는 방안이 대안으로 거론됩니다. 미국은 현지 고객과 시장 수요에 대응하는 생산기지로 활용, 한국에선 첨단공정과 연구개발 등 핵심 역량을 집중하는 방식입니다. 국내 생산기반이 흔들리지 않도록 전력·용수 인프라와 세제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문도 나옵니다.
해외 생산기지를 늘리는 것 자체를 경계하는 시각도 있습니다. 김양팽 연구원은 "현재 한국에서 메모리 반도체를 집중적으로 생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경쟁력을 갖는 것"이라며 "해외 공장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우리의 가치가 그만큼 떨어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정부 입장에서는 협상을 마냥 끌기도 어렵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서 한국의 대미투자특별법 처리가 늦어지자 한국산 제품의 관세를 15%에서 25%로 되돌릴 수 있다고 압박했습니다. 투자와 관세를 연계한 압박은 언제든 되풀이될 수 있습니다.
미국이 쥔 카드는 관세뿐만이 아닙니다. 강제노동 상품 거래와 과잉생산 문제 등을 놓고 무역법 301조 조사를 진행하는 가운데 불법 환적 문제까지 불거졌죠. 통상과 안보의 경계도 흐려지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한·미 연합훈련을 대폭 축소하라고 지시했다고 밝힌 데 이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대화 재개 가능성을 잇달아 언급했습니다.
일각에선 "메모리 투자는 신중히 따져도 3500억달러 대미 투자 협상 전체를 붙들고 있을 이유는 없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반도체처럼 전략성이 큰 사업은 별도로 득실을 따지되 첫 프로젝트는 미국의 선호를 일부 반영해 조기에 확정하는 편이 낫다는 겁니다. 미국이 쓸 수 있는 통상·안보 카드가 많은 데다 일본도 대미 투자 이행에 속도를 내고 있어서입니다.
김태황 명지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첫 사업부터 우리의 최대치를 얻으려고 하기보다 '세컨드 베스트'를 선택해 빨리 진행하는 게 낫다"며 "미국이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이 투자라면 첫 단계에서는 미국의 의향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이후 협상에서 우리의 요구를 확보하는 전략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오는 11월 미국 중간선거까지 기다려도 상황이 유리하게 바뀔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판단입니다. 정권이나 의회 지형이 달라지더라도 미·중 패권 경쟁에서 비롯된 보호무역 흐름 자체가 뒤집히기는 어렵다는 겁니다. 그는 "중간선거에서 만일 민주당이 이기더라도 한국이 투자 협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며 "관세 정책은 이미 되돌리기 어려운 흐름이 됐다"고 평가했습니다.












